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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22일 토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제라드 다비드 <이집트로 피신 중 쉬시는 성모님과 예수님> 성화 및 해설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249번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 영성체 성가  159번 세상의 참된 행복
예물준비 성가  217번 정성어린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502번 주의 빵을 서로 나누세
예물준비 성가  513번 면병과 포도주 영성체 성가  178번 성체 앞에
파견 성가  240번 복되신 마리아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입당송

시편 45(44),10 참조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성자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 어머니요 모후로 모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보호를 받아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10ㄴ 참조)
◎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23,9.10 참조
◎ 알렐루야.
○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고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9,1-6)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여 이 예물을 드리며 간절히 청하오니
십자가에서 자신을 깨끗한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저희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1 : 어머니이신 마리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 ( ) 축일에
아버지를 찬송하고 찬양하고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2 :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

거룩하신 아버지,
모든 성인을 훌륭히 이끌어 주신 주님을 찬미하고
특히 저희가 기념하고 공경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노래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주님께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큰일을 하시고
대대로 자비를 너그러이 베푸셨나이다.
비천한 종 마리아를 돌보시어
마리아를 통하여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원자로 보내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45 참조
주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시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저희가
영원한 천상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주요 호칭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몇 번을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쓰십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인간 존재나 인류를 가리킵니다. 특히 에제키엘서나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구별된 이로 ‘보통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다른 의도로 당신께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그분의 인성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수행하신 메시아 사명을 통하여 드러난 존엄한 신성까지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지니고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받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의 신분과 사명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만을 좋아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1요한 3,1 참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보통의 인간으로서 ‘사람의 아들’로 불린 에제키엘은 영광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천상 어좌를 보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의 명을 우리가 따른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제라드 다비드 <이집트로 피신 중 쉬시는 성모님과 예수님>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22.“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 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 형제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또한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이, 말씀을 성취하는 이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8.10)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후~’하고 불면 날아가 사라져버릴, 흙도 아닌 흙의 먼지로 창조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아멘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주님의 제자弟子다운 삶

-주님의 영광榮光이 가득한 주님의 집-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아름다운 축일답게 입당송도, 새벽 성무일도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시편45,1)

“우리의 동정성모 성마리아께 영광의 화관씌워 드높이시고

여왕과 어머니로 세운삼위께 영원한 찬미찬양있어지이다.”-

 

오늘 말씀 묵상중 ‘다운’이란 말마디가 떠올랐고, 강론 제목을 ‘주님의 참된 제자들’에서 ‘주님의 제자다운 삶’으로 바꿨습니다. 아주 오래전 52년전 서울교대 학장님의 호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스승답게’살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다운’이라 정했다 했습니다. 스승다운, 제자다운, 수도자다운 삶이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정을 들으니 사람이 되는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아주 노골적이자 직접적 표현을 나눴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느님 중심이, 예수님 중심이 빠져버리면 사람이 아닌 괴물이, 급기야는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광신도狂信徒가 또는 악마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비로소 참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참으로 어려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를 위한 신앙교육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아주 예전에 써놨던 아주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푸른 산 깊은 산 맑은 물

푸른 삶 깊은 삶 맑은 영성

산에 가까울수록 흐르는 물은 맑고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흐르는 영성 또한 맑다”-1997.4

 

그대로 이상적인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상징합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좋은 삶, 깊은 삶은 겸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장마후의 요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물이 점차 줄어드니 물오리들이 거의 떠났고 얼마 지나 물이 마르면 물오리들은 물을 찾아 완전히 다 떠날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역시 늘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살 때 물오리들이 물을 찾아오듯 신자들도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맑게 흐르는 삶, 바로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표현입니다. 늘 새롭게 맑게 흐르는 삶, 참으로 매력적인 파스카의 삶이요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의 모범이 주님의 어머니이자 제자라 할 수 있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원래는 성모성월의 마지막날인 5월31일에 지냈으나 1970년 새로운 로마 전례력에 8월22일 오늘로 옮겨졌는데 이는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의 8일 축제를 마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5단에서,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하는 지향으로 기도를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왕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 오롯이 순종하심으로써 천상모후가 되셨습니다. 아드님 예수님처럼 ‘비움-순종-섬김-겸손’으로 요약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제자다운 삶을 사셨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는 우리에게는 평생 배워야 할 영적 삶의 롤모델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된 제자다운 삶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외적 껍데기의 허영스런 삶이 아니라 내적 알맹이의 실속있는 진실하고 겸손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혐오했던 삶은 위선의 허영스런 삶이었습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이란 말도 있듯이 외적 과시와 허영은 그대로 내적 빈곤의 반영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부정적 모습들의 나열입니다. 영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러니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외적 허영의 삶을, 표리부동의 삶을,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후반부는 그대로 참된 제자다운 삶의 요약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로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 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일체의 우상이 배격됨으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만민평등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성모님을 닮아 자신을 비워 섬김과 순종, 겸손의 제자다운 삶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역시 영적 역설의 진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섬기는 사람이, 겸손으로 낮추는 사람이 실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움, 섬김, 순종, 겸손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은 환히 빛날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위대한 선은 물과 같다’란 말도 있듯이 끊임없이, 소리없이 자기를 비워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살리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물을 닮은 섬김과 겸손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날 때의 여정을 역순으로 해서 돌아옴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집은 그대로 주님의 제자다운 공동체에 주시는 축복의 장면을 상징합니다. 에제키엘서 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영적 이스라엘 자손들인 너희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과연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살아있는 주님의 집인지, 또는 주님의 영광이 떠난 죽은 주님의 집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김과 겸손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집 공동체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오늘 복음은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습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습니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미국은 코로나19의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100명 중에 한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지 않는 이상 확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면 모르겠지만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나라들이 쉽고도 간단한 방법으로 지금은 확산이 둔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일까요? 그렇습니다.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코로나19의 확산을 70%는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더운 여름에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미국의 대통령도 ‘마스크 착용은 애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6개월 전에 이렇게 말했다면 미국이 세계 최고의 코로나19의 피해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건강을 과신하고 코로나19 파티를 했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19에 걸린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파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젊은이는 코로나19에 걸렸고,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젊은이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건강을 과신했고, 코로나19가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고, 어리석었습니다.’ 코로나19는 가족 간의 전파가 많았다고 합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에는 노약자도 있고, 지병이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코로나19는 생명에 위험을 주는 질병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19에 일부러 노출되는 행동은 본인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코로나19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것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잎은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은 바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풀잎의 지혜입니다. 코로나19라는 바람이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파도를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말은 새겨듣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식, 허위, 위선, 교만, 욕심, 이기심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코로나19를 이야기하면서 마스크착용을 겁쟁이의 행동이라고 따르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코로나19를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코로나19 파티를 여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스크일까요? 섬김의 마스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의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은 유혹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섬김의 마스크를 착용하였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겸손의 마스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겸손입니다. 첫째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의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모두가 쉬는 주말에 가끔씩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높은 분이 오신다던가, 부대 주변의 시설이 비바람에 무너졌을 때 청소를 하거나, 복구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실 다들 쉬고 싶은 주말에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일직사관이 인원을 모집합니다. ‘참호 복구 작업 20명 나와라. 장마철 대비 하수도 정리 작업 10명 나와라.’ 그러면 대게는 계급 순으로 밑에서부터 작업인원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에 계급이 높은데도 지원을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후배들이 잘 따르는 친구입니다.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작업도 쉽게 하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힘든 일, 고된 일을 해도 언제나 밝고 환한 그런 친구들은 쉽게 볼 수는 없지만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방을 하는 대학생 친구들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여름에 산으로, 들로 바다로 휴가를 가는데 공부방으로 휴가를 가는 친구들입니다. 다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작은 성당으로 자청해서 지원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늘의 별처럼 기쁨과 희망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횃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뒤로 숨기보다는 언제나 당당하게 앞서서 가셨던 주님처럼 선두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문득 힘든 일, 고된 일이면 늘 앞장서서 나아갔던 군 선배가 생각납니다.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22일 토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