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성서]이사야반 21회기 줌 강의
일시: 2021년 9월6일(월) 10시~12시
출석 6명
주제: 제9과 예루살렘의 깨어남: 새 예루살렘
49 - 55장
읽기 49,1-55,13
묵상과 생활 1~6
묵상과 생활 1. 50,4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교회, 인간관계, 일상의 시간과 일 등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50,4)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답) 2021년 8월29일 일요일, 가톨릭 굿뉴스 사이트의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에서 읽은 요셉신부님의 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오프라윈프리가 가장 많이 존경하고 그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는 '마이클 씽어'의 [될일은 된다]란 책에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죽이고 그 너머의 '고요'와 같은 어떤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기 시작하게 된 다음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쉼없이 지껄이는 그 목소리가 점점 자기자신이 아니라는 확신이 커졌습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이후에 그놈이 멈추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지만, 자신은 어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며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불교 명상이었습니다. 생각이 끊어져 고요한 평화로 들어갈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빨리 명상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명상을 해도 일상의 삶안에서는 또 다시 내면의 목소리의 종이 되어 휘둘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그는 또 다른 명상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면의 목소리 저편에 있는 '고요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니다. 자아의 목소리가 사리지는 것과 함께 절대자아의 목소리일 수 밖에 없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은가? 알고 싶지 않은가? 이 준엄하고도 따뜻한 목소리에 가부좌한 다리가 아파져왔지만, 다시 집중하여 그 목소리가 있는 곳에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요 그 자체였습니다. 자아의 목소리가 범접할 수 없는 곳, 고요 그 자체였지만, 그것은 평화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명상으로...우리로 말하면 거의 지성소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평화와 고요에 자신을 맡기는 연습을 하였고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일들 속에서 그 섭리가 자신을 이끌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쉼없이 지껄이는 자아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절대자아의 '고요한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기 위하여 매 시간, 매 사건마다 늘상 잊지않고 기도하고자 힘습니다. 소리없이 일하시는 사랑의 창조주 하느님게서 저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사람의 교리와 전통, 인습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과 법칙과 뜻이 저를 일깨워 주시어 지친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
묵상과 생활 2.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 아내와 남편, 종과 주인의 관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벗의 관계'로 표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것을 어떤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까?(49, 14-15; 54,4-8) 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답) 이사야서 49장 14-15절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하셨으므로 엄마와 젖먹이 관계. 54장 4-8절에서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 그분께서는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하였으므로....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이다". |
묵상과 생활 3.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55,8)는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합니까? 혹은 자신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과 언제나 같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주님의 뜻에 대한 식별의 필요성을 묵상해 봅시다. - 나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합니까? (답) 젊을 때 8시간 한토막 잠을 자던 내가 60대말이 되면서 4시간, 반토막씩 잠을 자게 되면서, 내 몸이 절대 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내 생명의 숨길을 조율하시다가 언제든 이승으로 그 숨길을 옮기실 분도 하느님이심을 확연히 알고 있습니다. 늘, 항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나의 자아의 목소리를 잠재우거나 내려놓고, 나의 자아 너머에서 조용하게 평화롭게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분별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 자신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과 언제나 같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주님의 뜻에 대한 식별의 필요성을 묵상해 봅시다. (답) 동갑내기 친구가 기독교 믿음에 열심이다. 그 친구에게 어쩌다 전화를 하면, 잠깐의 인사 후 거의 숨쉴 틈없이 예수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뿜어댄다. 긴 시간 전화통화에 나는 몇번의 추임새를 했을 뿐이다. 구약의 율법은 구원이 아니고, 신약의 예수님 사랑이 구원이라는 그런 논리인데, 한참을 들었는데, 뭐기 뭔지를 잘 모른다...ㅠㅠ... 일방통행으로 전달하는 기독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지쳐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같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그녀의 기세있는 발언에 어찌어찌해서 내가 간신히 발언의 기회를 얻어 한마디하면, 여지없이 깔아뭉개지므로, 납작엎드려 쥐죽은 듯 있는게 편안하다...ㅋㅋ.... 가끔은 동갑내기 그 친구가 하느님의 옷을 입고, 하느님의 말로 둔갑하여, 타인을 통제하고 타인 위에 오롯이 우뚝 솟고 싶은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가? 라고 느껴진다. 한시간여 만나면 오직 그녀의 독무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이란? 나의 경우...상호소통, 나눔과 배려, 종의 마음, 을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 생각도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거나 고착화된다면, 주님의 뜻이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늘상 주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묵상과 생활 4. 하느님께서 친히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처음 깨달은 때는 언제입니까?(45,5-6) (45,5-6) 나는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너를 무장시키니 해 뜨는 곳에서도 해 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 친히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언제입니까? (답) 지금의 내 나이 69세, 하느님께서 친히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만 65세가 넘을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유인즉, 젊을 때는 내 마음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약한 의지력, 지구력, 나의 부족한 재능을 탓하면서 나를 교정 수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만 65세가 넘으면서부터, 내 몸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내 마음이나 의지나 의식이 아니라 그것 너머에 있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나를 핸드링하고 계심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처음 깨달은 때는 언제입니까? (답)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솔직히 말해서...나이 69세인 지금까지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우주 속 지구안에 대한민국 작은 땅에 여자라는 허울을 쓰고 태어났는데...테어난 이상, 그냥, 사회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죄충우돌하면서, 생명의 기운따라 울고 웃으며 그렇게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승과의 작별이 멀지 않은 이 나이에, 그룹성서 이사야반 문제의 답을 내기 위하여,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깊은 산골 골짜기 이름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 살면서, 살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하며...즐겁게 행복하게 사는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가톨릭 굿뉴스 매일미사 복음이 나에게 소명을 가르쳐주시는 글이라고 느껴져 반가웠다. 예수님께서 나사렛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는 그 장면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소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다가왔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이사61,1-2) 두루마리의 내용처럼...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주님의 파동을 나를 통해서 전달하는 일이 나의 소명이라고 깨달았다. |
묵상과 생활 5.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음미하고 나누어봅시다. 고통의 긍정적인 의미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보시겠습니까? - 주님의 종 첫째노래에서 음미하고 싶은 구절...(42,3-4)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즉,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자비로운 주님의 종'...자비의 하느님이 연상된다. 자비의 하느님은 지치지 않고 기가 꺽이는 일 없이 세상에 공정을 세울 것을 굳게 믿습니다...^^ - 주님의 종 둘째노래에서 음미하고 싶은 구절...(49,2-3)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즉, 날카로운 칼, 날카로운 화살로 세속적 욕망, 번뇌를 끊어내는 불교의 문수보살 같은 지혜의 화신이 연상된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나의 자아를 끊어내고, 하느님의 절대자아에 나를 내맡기는 지혜로운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주님의 종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리라. - 주님의 종 세째노래에서 음미하고 싶은 구절...(50,6-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즉, 하느님의 신성을 100% 부음받은 사람이 만일 존재한다면, 그는 최고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매질 당하고, 모욕과 수모를 받아도 얼굴을 가리지않고, 수치스럽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차곡차곡 실현해야 하리라. 억압받은 이를 구원하려는 주님의 종은 마치 불교의 보현보살 같은 성덕의 화신이 연상된다.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성덕을 베푸는 주님의 종, 내공의 깊어 어떤 상황에서도 차돌같은 얼굴을 지닌 주님의 종은 보현보살 같은 덕의 화신이다. - 주님의 종 네째노래에서 음미하고 싶은 구절...(52,14-15)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 망가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질겁하였지만, 그를 보고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하느님의 듯에 철저하게 순명하시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완전하신 주님의 종이 연상된다. - 고통의 긍정적인 의미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보시겠습니까? (답) 하느님은 태양과 같이 무궁무진한 사랑을 나에게 퍼부어 주시면서...나의 영성의 성장을 도모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나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모두 세고 계시는 자상하신 아빠 하느님께서는 내가 견딜만한 고통을 주시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나의 자아의 소리를 점점 작게 잦아들게 하시고, 절대자아를 점점 확장시키어 크고 높고 깊은 영성으로 거듭나게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묵상과 생활 6. 내 인생에서, 혹은 일상에서 기쁜 소식(52,7)을 알려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52,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답) 내 인생에서 평화와 구원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가톨릭 굿뉴스 사이트>와 카톡방에 강론을 전달해주는 수산나 언니라고 생각을 한다. <가톨릭 굿뉴스 사이트>에서 매일미사 독서와 복음 및 묵상,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에서 신부님의 강론을 읽고... 나의 다음 블로그에 업로드를 한다. 2011년 3월1일부터 현재까지 11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수산나 언니가 카톡방으로 전송해주는 신부님 강론 등은 2018년 7월부터 지금까지 3년째 그 소식을 받고 있다. 거의 정확하게 아침 7시 즈음해서 배달해주는 언니의 성실성에 감사하면서 받고 있다. 이 강론 등은 나의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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