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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8월 19일 금요일[(녹) 연중 제20주간 금요일]/정용진-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매묵]2022년 8월 19일 금요일[(녹) 연중 제20주간 금요일]/정용진-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백] 성 요한 외드 사제

입당송

시편 84(83),10-11 참조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뼈로 가득 찬 계곡으로 데리고 가시어 마른 뼈들을 살리시며,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7(106),2-3.4-5.6-7.8-9(◎ 1 참조)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말하여라, 주님이 구원하신 이들,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들.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 북녘과 남녘, 뭇 나라에서 모으신 이들은 말하여라. ◎
○ 사막과 광야에서 그들은 헤매며,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 찾지 못하였네. 굶주리고 목말라, 목숨이 다하였네. ◎
○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구해 주셨네. 그들을 바른길로 걷게 하시어,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게 하셨네. ◎
○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

복음 환호송

시편 4.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 알렐루야.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0(129),7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2022년 08월 19일 금요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릴 적 캄캄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십계명 가운데서 한 계명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법하느님께서 돌판 위에 직접 새겨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십계명이 아닌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한 구절씩 선택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부정형의 엄중한 명령문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계명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본래의 질문은 가장 큰 계명 하나를 뽑아 달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이어 둘째 계명을 더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같다고 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스스로 그 두 계명을 다르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기도와 침묵피정과 묵상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적이며 영적인 삶을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경향을 낳을 수도 있는데그렇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가 사람들에 대한또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성경의 전통교회의 가르침에서 모두 동떨어진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사탄이 방해하는 첫 번째 기도: 식사 전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의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인간이 이 계명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질투 해서 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방해하는 기도가 무엇일까요? 이것만 하지 못하게 하면 인간이 계명을 지키게 하지 못하는 데 거의 다 한 것이 됩니다. 

 

    지금의 멕시코에서 번성하였던 아스테카 문명이 있습니다. 이 문명은 상당히 발달한 지식을 가졌었습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사람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인육을 자기 백성들에게 먹이는 일도 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조사에 따르면 왕의 생일 때 500만에 가까운 백성을 먹이기 위해 20~30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남자 한 명당 가격이 5천만 원이나 했다고 하니 백성들은 임금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임금이 주는 음식에 감사하면서 왕이 하는 행위 또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타인을 해치며 그로부터 얻은 획득물을 주어 먹여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을 주는 대상에 감사하면 그 대상이 하는 일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그가 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족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사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이런 시스템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존재에게 양식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에 도착하였습니다. 군인은 600명 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600명으로 사냥에 최적화된 500만의 아스테카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말린체(Malinche)입니다. 

 

    말린체는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새엄마가 유산을 자기 아들에게만 물려주려 했기에 말린체를 몰래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말린체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서 결국 코르테스의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스텍어, 마야어는 물론이요 스페인어까지 능통하였습니다. 그녀는 코르테스에게 자신이 협조하면 나중에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그런 문화를 없애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코르테스는 그녀에게 그것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말린체는 아스테카의 제물 사육장으로 사용되는 수많은 부족에게 스페인에 협력하면 더는 사냥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렇게 많은 부족들이 코르테스와 연합하게 되었고 덕분에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문명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말린체는 원주민으로서 공식적으로 첫 번째 세례를 받고 첫 번째 메스티소(원주민과 스페인계 혼혈)를 낳았으며 첫 번째 스페인 귀족이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사람을 잡아 바치고 그것을 먹는 문화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하느님의 체제로 변화시키려 했던 인물입니다. 이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그렇게 내어주시는 양식이 당신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식사할 때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사랑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이건 네 부모님이 고생해서 주신 거야!”, 혹은 “네가 번 것으로 네가 먹는 거야!”라고 자신과 인간에게 감사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자아에 감사하는 것이고 뱀의 시스템을 긍정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부모의 부족한 면까지도 그 음식에 감사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밥을 주는 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밥이 자신의 살과 피일 수 있다면 그 밥을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자신 안에서 양식이 솟아납니다. 피조물은 타인을 죽여서 그것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에 감사하면 그 시스템을 긍정하고 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믿고 영해야 하는 이유이고 식사 전 기도 때, 마치 작은 미사를 거행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하며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마치 성체를 영할 때의 그 마음으로 하고 식사한다면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신부님들과 식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로마에서 유학 중인 청주교구 신부님이 뉴욕에 왔습니다. 마음이 통해서 몇몇 신부님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모임 날이 되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모임의 동기를 주었던 청주교구 신부님은 한국에 계시는 가족의 장례 때문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갑자기 면담 요청이 온 신부님은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름행사로 피로가 겹친 신부님은 다음 기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섯 명이 모여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두 명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명이 대화하면 주제가 다양한 면이 있지만 진지한 대화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이야기를 하니 가족이야기, 여행이야기, 미국생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제게 두 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노후에 대한 질문입니다. 미국에서 사제들은 알아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은 아직은 젊지만 노후에 대해서 어찌 해야 할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저는 31년 사제생활을 하였고, 앞으로 한 텀이 지나면 원로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제가 속한 교구에서는 원로사목자들에게 공동숙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미사예물도 지원해주고,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노후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시간관리와 건강관리 그리고 영적인 생활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목의 현장에서 떠나면 개인의 시간이 많아질 것입니다. 악기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적당한 취미와 봉사의 시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관리에 좋을 것 같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강론에 대한 질문입니다. 매일 저의 강론을 인터넷을 통해서 읽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성당에서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강론 준비가 늘 숙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신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말씀에 소홀한 강론은 좋은 이야기는 될 수 있지만 참된 강론은 될 수 없습니다. ‘시대의 표징입니다.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치료를 시작합니다. ‘입니다. 말씀을 강론한 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 욕심을 채우려한다면 예수님께서 책망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될 것입니다. 삶이 함께하지 않는 강론은 속빈 강정이 될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기도는 좋은 강론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둘이라서 단출했지만 둘이라서 영적인 대화를 더 많이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후배 신부님도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후배의 질문에 저보다 더 현명한 대답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삶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사랑의 여정

-배움, 훈련, 습관-

 

“감사를 이길 운명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습니까?”

“경남 양산 통도사 근처예요. 남편도 잘 있습니다.”

“부산 사직 야구장 왔습니다. 실업급여 6개월 받고 9월부터 어린이집 다닙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와 수십통의 카톡 사진 받고 반가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신혼부부인데, 행복하게 사랑하며 잘 살고 있는 환한 부부 모습 사진이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참 힘들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사귀어 결혼이후에도 참 서로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두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수도원 피정집에서 2박3일 조촐하게 지냈고, 무엇보다 두분 얼굴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부부는 물론이고 친구도 그렇고 주님은 더욱 그렇습니다. 참 신비한 것이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 갈수록 자기 고유의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지도시 자주 한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앞에 갔을 때, 먼저 얼굴 검사합니다. 주님 얼굴을 닮았나 안 닮았나 검사할 것이고, 주님 얼굴을 닮은 이들이 하늘 나라에 입장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님을 닮습니다.”

 

마침 어제 얼마전 찍은 수도 형제들의 영정사진 일부를 받고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 죽음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묘한 느낌까지 들어 잠시 착잡한 마음이었습니다. 과연 지금 죽는다면 죽음 준비는 되어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만이 최상의 죽음 준비이겠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자체가 바로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문득 얼마전 써놨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며 어둡고 우울하게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 ‘사람’입니다. 요즘 한낮엔 덥지만 이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시원한 바람에 흰구름 푸른 하늘도 높아 보입니다. 배밭사이 산책을 하다보면 웬지 배열매 익어가는 향기도 느껴집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열매 익어가는 향기는 더욱 좋습니다.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초연하게 합니다. 아마 노년의 사랑은, 노년의 향기는 이러할 것입니다. 과연 사랑의 열매들이 잘 익어가는 사랑의 여정, 노년의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열매들이 잘 익어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교사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일생일대 최우선의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 사랑! 한결같은 갈림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수요 열정입니다. 일상의 수행을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온갖 수행을 합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수행입니다. 이러면서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을 닮아 내 본연의 참 얼굴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 사랑이 빠져 버린 삶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도저히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넓은 골짜기에 무수히 널린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 바, 희망과 사랑이 실종된 바빌론 유배중인 이스라엘 집안이자 우리 인간 군상을 상징합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마른 뼈들 같은 인생은 아닌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게 하겠다. 너희에게 영을 넣어주어 살게 하겠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말한다.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 가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너희를 살린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 가겠다.”

 

희망의 예언자 에제키엘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영이, 희망의 영이 선사될 때 비로소 마른 뼈들 같은 죽은 인생이 살아납니다. 그대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이 빠지면 마른 뼈들같은 죽은 인생이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폐인이나 괴물 인생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이래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 사랑의 학인이 되어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5. 이영근 신부 강론

 

220818. 연중 20주간 목요일.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 22,8)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대는 혼인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주님! 

잔치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찬미와 감사의 거룩한 예복을 갖추게 하소서!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당신의 갑옷을 차려 입게 하소서! 당신 진리의 옷을 입고, 빛을 살게 하소서! 기쁨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