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8월 21일 주일[(녹) 연중 제21주일]/전삼용-조재형-정용진-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대영광송>
본기도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모든 민족들의 주님,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둘러앉은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성찬으로 힘을 얻고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전하러 나가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공직자들에게 주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섬기는 마음을 심어 주시어, 비리와 부정의 유혹을 떨쳐 내고 언제나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3.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오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더위 속에 더 큰 고통을 겪는 가난한 병자들을 찾아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소서.
4.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사랑이신 주님, 저희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시어,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기꺼이 견디어 내게 하시고, 주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문으로 들게 하소서.
예물기도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저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흩어진 인류를
성자의 피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한 가족이 되게 하시고
삼위의 일치를 본받아 모인 백성이
주님의 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6,5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좁은 문: “오늘 어떻게 살까?”, 아니 “어떻게 죽을까!”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줄거리입니다. 매들린은 아주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법. 매들린은 늘어가는 주름이 걱정입니다. 이때 어릴 적 친구 헬렌이 남자친구 멘빌 박사를 소개하겠다고 옵니다. 멘빌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매들린은 헬렌의 남자친구에게 치근댑니다. 멘빌도 매들린이 싫지 않습니다. 헬렌은 매들린이 항상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았다며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멘빌은 그렇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매들린과 결혼해버립니다. 헬렌은 상심한 나머지 폭식하여 살이 찌고 정신병원에 갇힐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헬렌이 파티를 한다고 매들린과 멘빌을 초대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보려고 갔지만 헬렌은 훨씬 젊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엔 헬렌이 멘빌을 다시 꼬십니다. 멘빌도 자신을 자기 주름보다 못하게 여기는 매들린이 지겹습니다. 그래서 매들린을 죽이기로 합니다.
계단에서 밀어서 매들린을 떨어뜨린 멘빌은 헬렌에게 전화합니다. 그런데 매들린이 목이 꺾인 채로 멘빌에게 다가옵니다. 멘빌은 기겁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에게 질 수 없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몸은 좀 망가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누가 좀 고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합니다.
이때 매들린이 죽은 줄 알고 헬렌이 들어옵니다. 매들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헬렌을 총으로 쏴서 배를 뚫어버립니다. 하지만 헬렌도 죽지 않습니다. 헬렌도 그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죽도록 싸우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히 살려면 자기 몸들을 고쳐 줄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멘빌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화해하고 멘빌에게도 영생의 약을 먹도록 권합니다. 멘빌은 괴물이 되어 버린 두 여자를 두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을 버립니다. 그는 죽기를 택한 것입니다.
37년 뒤 멘빌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멘빌은 다시 결혼하여 자녀도 많이 낳고 모험도 즐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두 명의 여인은 비웃습니다. 바로 매들린과 헬렌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면 뭐 하냐, 살아있는 게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은 슬픕니다.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또 살기 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십니다. 좁은 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미사에 와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살지?”
이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매들린과 헬렌이 영생의 약을 먹고는 매일 아침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멘빌 박사는 다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는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혼자서 330척과 대적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11척도 죽자고 덤벼서 결국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죽으려고 하는 삶,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더 완전한 모습으로 살려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죽으려 하면 생명 유지를 위해 간직한 아주 작은 것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맡김은 하느님의 자녀됨으로 하느님처럼 됨입니다. 우리에겐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죽으려 하며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살려고 하며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예수님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보라고 권하십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하루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조재형 신부 강론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그리고 2022년 8월 21일입니다. 8월 21일은 제게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019년 8월 21일 오전 11시 30분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뉴욕에 온지 꼭 3년이 되는 날입니다. 3달만 하기로 했는데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묵상에 강론을 올린 것이 어느덧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견사제연수, 용문청소년수련장, 성소국장, 제주 엠마오 연수를 거쳐서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습니다. 중견사제연수는 사제생활 20년을 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지내라고 하셨을 때는 기뻤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여름 캠프를 다녔던 곳입니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평화로운 날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교구장님은 제게 성소국장으로 교구청에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습니다. 교황님 방한 준비위원으로 일할 수 있어서 보람 있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하면서 새 사제들을 보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제주 엠마오 연수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 같았습니다. 여러 교구에서 온 신부님들을 만났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은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지만 새로운 경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신앙인은, 사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사막과 같은 곳이라면 그곳을 오아시스로 만들어서 생명이 자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화합과 일치로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이 있는 곳이라면 이해와 용서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제게 3가지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첫째는 미주지역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며, 삶을 나누는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야 합니다. 기존의 수입은 구독료, 광고료, 후원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뉴욕으로 온 지난 3년은 어쩌면 긴 시련의 터널과 같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본당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면서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덕망 있는 사제들에게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신부님들은 기꺼이 글을 보내 주었고, 글은 팬데믹 터널을 지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를 늘려야 하는데 홍보자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주가톨릭신문은 팬데믹의 터널을 나오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본당활동이 재개되면서 대림/ 사순특강을 다니면서 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구독자가 늘어 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제들과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길을 찾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다니면서 팬데믹의 터널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영광의 문이 아닙니다. 권력의 문도 아닙니다. 재물의 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하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희생의 문, 사랑의 문, 용서의 문, 겸손의 문입니다.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모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3. 정용진 요셉신부 강론
보통 마태오 복음은 엄격하고, 루카 복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도 엄중하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여간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문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 문은 닫힐 것이라고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사람들이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많은 유사 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숫자 놀음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원받기 위한 첫째 조건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싸웁니다]”(1코린 9,2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힘겨운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그릇된 논리와 유혹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둘째 조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자신이 약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를 받고 교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꾸준히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자기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는 항변에도
주인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4.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0820. 성 베르나르드 아빠스 학자 기념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 이제민)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니,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이, 말씀을 성취하는 이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이일 것입니다.
<둘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이요, 남에게 보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일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0-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돼새김 구절]
1.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전삼용 신부 강론)
2. 신앙인은, 사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사막과 같은 곳이라면 그곳을 오아시스로 만들어서 생명이 자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화합과 일치로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이 있는 곳이라면 이해와 용서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강론)
3.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힘겨운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그릇된 논리와 유혹에 맞서 싸우셨습니다.(정용진 신부 강론)
4.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이영근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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