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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3일 화요일[(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3년 1월 3일 화요일[(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명

입당송

시편 118(117),26.27 참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본기도

하느님,
성자께서 거룩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저희와 똑같은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그 창조의 능력으로
저희가 옛것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3ㄷㄹ-4.5-6(◎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14.12 참조
◎ 알렐루야.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성탄 감사송 2 : 강생으로 온 세상이 새로워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성탄을 경축하는 오늘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이제는 이 세상에 들어오셨나이다.
그분께서는 타락한 만물을 당신 안에 일으키시어 온전히 회복시키시고
버림받은 인류를 하늘 나라로 다시 불러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에페 2,4 로마 8,3 참조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03일 화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정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보라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유다교에서는 파스카 준비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어린양을 잡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를 향하여 가셨다고 말합니다(19,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19,36 참조).

이 말씀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을 피하고자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구워 먹어야 하였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치실 때 그 집을 지나가십니다.

이 사건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파스카의 어린양과 비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 사건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성인聖人이 됩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제 ‘탄생’ 영화를 봤습니다. 전해 전주 월요일 성탄 다음 판공일 2022.12.26일 월요일 수도형제들은 ‘아바타’ 영화를 봤는데 저는 ‘탄생’인줄 알고 신청했다가 취소했는데 일주일후 월요일 어제 보게 됐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끝기도후 친교의 날에 수도형제들은 유익한 영화를 휴게실 TV 방에서, 다음날 목요일 기상 시간은 평소보다 1시간 늦은 5:30 기상이라 여유있게 보지만 저는 오후 8:30취침하기에 어김없이, 미련없이 도중에 나와 잠자리에 듭니다. 다음날 1시 전후로 일어나 강론 쓰는 중요성과 비교하게 되며 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에 주저없이 일어나 침실로 갑니다.

 

그러나 어제 151분 영화관에서의 ‘성탄’관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안 이후로는 거의 관광觀光에 흥미를 잃어 관광 여행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행후의 공허를 생각하면 추호도 생각이 없는 관광여행입니다.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순례巡禮여행입니다. 관광여행의 끝은 ‘텅빈 공허’지만 순례여행 끝은 ‘텅빈 충만의 기쁨’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탄생’ 영화 151분이 ‘피정같았다는데 저는 성지순례한것 같았습니다. 밤 12:30분 기상에도 불구하고 조는 일 없이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아마도 천주교 사제이기에 더 마음이 와 닿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인자한 관장의 취조시 김대건이 울자, “신부님도 웁니까?” 라는 안성기 배우의 물음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출했다니 감동입니다.

 

“아, 역사는 반복되는 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구나! 물론 잔인한 고문이나 쉽게 사람 죽이는 일은 없지만 형태만 교묘하게 바뀌었을뿐 계속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이구나! 

민주화됐다지만 가부장적 수직적 권위 의식은 그대로구나! 결코 역사에 생략이나 도약은 없구나! 사람안에 내재한 잔인성, 공격성, 폭력성의 야만은 그대로이구나! 

인간 무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가! 환경 탓할 것, 사람 탓할 것이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는 것이 유일한 답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자 사랑임을 잊지 않는거다!”

 

등 깨달음을 가득 간직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사실 하루속히 ‘지구타이타닉호’의 경로를 바꾸어야 한다고, 모든 과학적 연구가 한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본질적으로 유의미한 정치적 결단이나 변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세계의 붕괴와 함께 필연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과 이웃을 향한 원망과 분노, 적개심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형태의 폭력과 광란의 소비주의가 마치 시대의 특징인양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탄생을 보고 김대건 사제에 감동한다 하더라도 1회성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억, 기념할 뿐 아니라 각자가 그 삶의 자리에서 부단한 영적혁명의 회개로 성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각성을 새로이 한, 꼭 성지순례 느낌의 영화 감상 시간이었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민주화운동이요 독립운동의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는 내전상태같은 남북南北의, 남남南南의 분열의 깊은 골을 어떻게 메꿔 평화의 공존공생의 길을 갈지가 참 엄중한 우리의 과제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우리 하나하나가 불신의 늪, 전쟁의 늪에서 탈출하여 영적혁명의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 성인의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성탄에서 김대건 역을 한 윤시윤 배우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난 소감의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머 감각도 너무 좋으시고,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다. 한국과 관련된 농담도 하시고 그랬다. 김대건이란 인물을 표현해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바티칸에 가면 성 베드로, 요한부터 압도적인 규모로 성인들의 동상이 있는데 비어있는 마지막 칸은 김대건의 자리라고 하더라.”

 

개신교 신자이면서 영화 ‘탄생’을 감독한 박흥식 형제님의 교황님 알현시 교황님에 관한 내용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교황님께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어요. 교황님이 ‘한국인은 고난 속에서도 미소짓는다’고 하셨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영화를 벌써 보셨나 싶었죠. 그날 교황은 ‘제가 여러분의 방문으로 영광을 받고 있다’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인간으로 아름다웠던 분의 삶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 건 여러분에게도 축복’이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순교전 교우들에게 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회유 서한을 잊지 못합니다.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 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만25세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직전 유언이라 놀라울뿐입니다. 저는 무려 성인보다 세배를 살고 있으니 성덕은 “얼마나”의 햇수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사랑의 질에 달렸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해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복된 선종의 축복선물을 주셨습니다. 12월31일 독일어를 모르는 한 간호사가 한밤중에 교황님이 돌아가시기 전 이탈리어로 세 번쯤 하신 마지막 임종어를 분명히 들었다 합니다.

 

“Lord, I love you!”(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황님의 전삶의 요약과도 같은, 정말 성인다운 임종어입니다. 탄생 영화의 가르침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을, 또 하느님의 우리 향한 간절한 바람을 단 하나로 요약하면 참사람의 진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응답하여 온맘과 온맘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는 자가 성인입니다.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가 있습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환경을,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성인이 되지 못함을 탓하며 날마다 평생 성인이 되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지는 만큼 세상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더디더라도 진정 이것이 역사의 진보입니다. 성인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 우리를 성인이 되라 격려하고 고무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진짜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그리스도처럼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알고 보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려 주님을 진면목을 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말한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눈이 열려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그러니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처럼 늘 속으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고백할수록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을 읽는 것은 마치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오늘은 지난 12 25일자 신문에서 읽은 지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3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기도하지 않고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선교를 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위 두 가지를 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죄를 지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쓸모없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신앙인의 맛과 멋이 드러나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희숙 엘리사벳 자매님께서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느낀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고국에 신앙이 전해진지 200년의 시간, 하느님을 가슴에 품어 안고 말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100년의 길었던 박해 동안 피를 뿌려 흘린, 흘러 적신 이 강산 골짜기 구석구석 돌아보니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그들의 힘겨운 발차취가 남겨져 있고 피로 증거한 삶의 터에 교회라는 신앙의 두 글자 남아 하느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게 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절절히 부르던 예수, 마리아! 그 모습 선연하고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 존재의 목적이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그들은 자기 존재 목적을 어찌 그리 명백히 알았을까요?

 

안 믿는다는 말 한마디면 족했을 텐데, 양반뿐 아니라 천민, 노비, 상인들의 비천한 신분으로도 하나뿐인 목숨을 신앙이랑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한지에 물 묻혀 얼굴에 덮어 씌워 질식해 죽어가고, 태형에 아사형, 산 목숨을 굴비 엮듯 엮어 물에 수장하고, 하천 모래구덩이에 선 채로 생매장, 숨져가면서도 아니 두 다리 붙잡혀서 도리개질, 태질을 당해도, 높은 곳에 목 잘려 참수를 당해도, 살아 못 섬길 천주를 죽음으로 섬긴 분들입니다. 임금께 받은 하해지택을 대역죄인, 능지처참으로 바꾼 황사영, 27세 젊은 목숨 천주께 바치고 그 아내 정난주 마리아가 걷던 긴 귀향길, 추자도에 떨군 갓난아기, 어미의 가슴에 박히운 대못은 몇 자 였을까요?

 

또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가 겪던 아픔은요?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처절한 슬픔마저 느낍니다. 어찌 한 마디의 말, 느낌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금자를 가지고 우리 발자국을 재고 있습니다. 형제여, 힘을 내십시다.’라고 했던 최경환 성인이 있습니다.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분이 손잡아 주시고 함께 해 주신 길, 제 신앙의 뿌리, 제게 전해진 신앙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 핏빛 내음인지 마음으로부터 아려오던 날들이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이라지요, 만남은 은총이라고요. 제가 만난 하느님, 은총 중의 은총, 금총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터, 치명지, 무덤 앞에서 마음 안으로 숨어들던 생각들, 내 삶은 하느님을 살고 있는가?” 저도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진한 감동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2023년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우리들 땀과 노력으로 이어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을 증언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의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자가 보내집니다. 

    “***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문자를 받은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며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배달 예정 문자를 보낸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어느 여학생의 집 근처 주유소에서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 보고 싶기도 하고 눈 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을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 묻어 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자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 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 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5.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02.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 인들에게 반복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요,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사실,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1/3(화)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허규 신부)

 

2.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눈이 열려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처럼 늘 속으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고백할수록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3. 2023년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우리들 땀과 노력으로 이어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을 증언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조재형 신부)

 

4.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5.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영근 신부)

 

[1/3(화)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제10일 기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머무르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3일(화)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