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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2일 월요일[(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월 2일 월요일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에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입당송

집회 44,15.14 참조
뭇 백성이 성인들의 지혜를 기리고 회중이 그들을 칭송하리라.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으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 환호송

히브 1,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4,1-7.11-13)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를 기리며
제사를 바치오니
이 제사가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저희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성탄 감사송 2 : 강생으로 온 세상이 새로워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성탄을 경축하는 오늘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이제는 이 세상에 들어오셨나이다.
그분께서는 타락한 만물을 당신 안에 일으키시어 온전히 회복시키시고
버림받은 인류를 하늘 나라로 다시 불러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1코린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를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02일 월요일 (성 바실리오 기념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월요일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로고스 찬가라고 부르는 서문(요한 1,1-18 참조)을 제외하면

요한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너희가 모르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뒤에 오시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인지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독특하게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구약의 예언자입니다(2열왕 2,1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를 종말의 때에 앞서 백성들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라 3,23 참조).

다시 한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예언자인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 예언자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후손들 가운데에서 일으켜 세울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 18,18 참조).

오늘 복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요즘은 처음 가는 길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자칫 길을 놓쳐서 다른 길로 갈지라도 내비게이션은 곧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인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서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나라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올바른 식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자신의 포도밭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았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였습니다. 분노가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영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장애물을 피하는 것이 바로 식별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식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을 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을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식별의 시간이 왔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넷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예수님은 발광체(發光體), 성인들은 반사체(反射體)

-이단에 대한 답은 성인들뿐이다-

 

 

동방교회의 4대 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오늘 축일은 지내는 성 대 바실리오와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분은 절친이었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주교직까지 수행한 분들입니다. 330년 같은 해에 오늘날의 소아시아 터키 지역의 카파토키아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안 이단과 격렬히 싸우며 끝까지 정통 교리를 수호했던 분들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교회 역사상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할머니 마크리나, 부친 바실리우스, 모친 에멜리야, 큰 누이 마크리나, 두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동방수도생활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수도생활에 대한 업적도 지대합니다. 성인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이는 세바스테의 주교, 에우스타시아였으며 다음과 같이 바실리오는 회심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일들에 대해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며, 헛된 일에 나의 젊음을 거의 소진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리석게 만든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복음서의 진리가 내포한 경이로운 빛을 목도했으며, 이 세계의 왕자들의 지혜는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복음서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회심 체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정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성인보다 10년 정도 오래 살았던 절친인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역시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생애 후반은 수도원에 은거하여 저술활동과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인 성인들은 이단에 대한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읽은 천사적 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는지 ‘공부전에 바쳤던 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오, 형언할 수 없으신 창조주 그리스도님, 

당신은 당신 지혜의 보고로부터 천사들의 세 품계를 가려, 저 높은 하늘 위에 배치하시고, 광대한 우주 질서를 참으로 아름답게 안배하셨나이다. 당신은 참빛과 참지혜의 원천이요, 최고 원리이시니, 제 아둔한 정신을 당신의 투명한 빛살로 환히 비추시어, 제 안에 타고난 뿌리깊은 두가지 어두움, 곧 죄악과 무지의 어두움을 말끔히 거두어 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의 혀를 달변으로 키워내는 분이시니, 날카로운 통찰력과, 오래오래 간직하는 기억력, 유순하게 배울 줄 아는 겸손과, 철저하게 파헤치는 해석력, 그리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슬기를 허락하소서.

 

진리탐구를 시작하는 저의 정신을 밝게 비추어 주시고, 힘차게 정진할 수 있도록 손잡아 이끌어 주시며, 모자람없이 완성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겸손한 기도문인지요! 말그대로 모든 이단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기도문이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교회의 사람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지난 12.31일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 역시 여기에 그대로 해당되는 성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요한1서는 당시 요한계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치열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적’과 대결중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 역시 다음의 간곡한 말씀을 통해 정통 교리의 수호자임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분안에 머물게 됩니다. 참으로 그분 안에 머무를 때 무지에서 벗어나 자신을 알고 주님이신 그분을 앎으로 저절로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교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니 결코 이단에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알면 알수록 참 자기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적그리스도의 이단자들은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교만에 눈먼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다.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정말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빛이신 주님의 증언자, 참으로 겸손한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인 세례자 요한의 고백입니다. 참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발광체發光體라면 겸손한 성인들은 예외없이 시종여일,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며 모두가 참빛인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이자 증언자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머물러 발광체이신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겸손한 진리의 증언자, 협력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1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또한 새해 첫 날, 모든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대축일을 축하드리며, 세배도 드립니다.
 
“축복의 멋진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모후이신 마리아)의 신비를 잠깐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일’, ‘인간이 하느님을 낳은 일’, 곧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우선 낳은 아기가 ‘하느님’이라는 신원의 정체성을 드러내줍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줍니다. 동시에 그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을 말해줍니다. 이에, 교회는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호칭을 직역하면, ‘하느님의 어머니’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Θεο(하느님)+τοκοσ(아기를 낳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동급인 신적인 존재이거나 또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이 아니며, 혹은 성부 하느님의 어머니도 성령의 어머니도 아니며, 단지 인간이자 피조물이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성자의 어머니’를 뜻하며, 성자의 강생을 비추어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오랫 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시는 분’, ‘다윗과 같은 임금으로서의 메시아’로 드러납니다. 곧 예수님은 ‘새 다윗 임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윗 왕가의 자손’(마태 1,1)임을 밝히며, 마리아는 ‘임마누엘의 어머니’(마태 1,6)로 증언됩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왕실의 모후’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다윗 왕조의 임금인 예수님의 어머니’라면 ‘왕의 어머니인 여왕 혹은 모후’로 부르는 것이 합당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서구 근대의 왕국에서 ‘여왕’이라는 호칭은 왕의 아내를 지칭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왕’ 혹은 ‘왕비’란 왕의 아내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태후’ 혹은 ‘모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왕의 어머니는 ‘모후’로서 영예를 누리며 공경을 받았으며, ‘왕관’을 쓰고 ‘왕 오른편에 놓인 왕좌’에 앉아 왕과 함께 다스렸고, 왕에게는 가장 유력한 ‘전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1열왕 2,13-18),
 
따라서 마리아가 ‘그리스도 왕국의 모후’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모후’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마땅하며, 또한 임금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도 합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마리아를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는 전통은 ‘그리스도 왕국의 천상 모후’라는 마리아의 정체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마리아 공경’과 ‘하느님 흠숭’의 차이점을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를 공경하고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되,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를 흠숭하고 숭배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우상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레미아서(7,17-18)에 나오는 ‘하늘여왕에게 과자를 만들어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경’과 ‘흠숭’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흠숭’의 본질은 희생제사였습니다, 곧 공경하고 간청을 드리고 찬가를 드리는 것은 영웅이나 위인들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있지만, 희생제사는 오직 하느님께 유보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으로 당연히 공경을 받으신다. 사실 오랜 옛적부터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로 공경을 받으시고,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곤경 속에서 그분의 보호 아래로 달려 들어가 도움을 간청한다. ... 공경은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온전히 돈독한 것이지만, 강생하신 말씀과 똑같이 성부와 성령께 보여드리는 흠숭의 공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또한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971항)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예배’와 ‘흠숭’은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며, ‘성찬례’는 오직 하느님께만 바쳐집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곧 ‘모후’로 공경하지만, 결코 마리아를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축일을 축하드리며, 새해 축복을 빕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 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1/2(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허규 신부)

 

2. 2023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3. 마리아를 공경하고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되,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습니다. (이영근 신부)

 

 [1/2(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9일 기도]

 

하느님!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듯...

성령으로 충만한 모든 사람을 공경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기꺼이 따라갈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월2일(월) 3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