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4일 토요일[(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본기도
저희가 마음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필요한 그 한 가지만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
○ 당신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
○ 당신의 의로운 법규 배울 때에, 올곧은 마음으로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당신 규범을 지키오리다. 저를 끝내 버리지 마소서.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예물로 저희를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제사를 합당히 봉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양식을 받은 저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시고
천상 지혜를 받은 저희를 구원의 샘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하느님,
믿는 이들이 바라던 복을 내리시어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신학교에는 전설과 같은 교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신약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성함은 ‘박상래’ 신부님입니다. 학생들은 신부님의 별명을 ‘박살래’로 부르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신약성서를 아주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신부님은 성서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론도 가르쳤는데 ‘예수’에 대한 책도 번역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가르침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책은 젊은 신학생들에게는 죽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는 모세와 같았습니다. 광야에서 황금 소를 만들어서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하게 꾸짖었던 모세와 같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복음’에 대한 신부님의 강의가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나라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신학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라틴어를 가르쳤던 허창덕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로만 엄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L’과 ‘R’의 발음을 잘 구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수업시간에 발음을 시키셨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못하면 분필이 날라 오기도 했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하면 잠시 웃기도 하였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들이 발음 구별도 못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북간도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북한으로 갔다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신부님께서 1년에 한번 ‘순한 양’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생일에 신학생들은 ‘선구자’를 불러드렸습니다. 그때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일생의 숙원 과제였던 ‘라틴어 사전’을 만드셨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신학생들도 신부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해 보라고 하셨던 ‘랄렐릴롤루’가 문뜩 생각납니다.
군대에서 흔히 듣던 말이 있습니다. “훈련 중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과 같다.” 훈련을 충실하게 받은 군인들은 실전에서 부상당하거나 사망할 확률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상급부대였습니다. 저도 주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사격훈련도 거의 하지 않았고, 행군도 거의 없었습니다. 9시에 사무실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서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일과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1달 전부터 전방에서 군인들이 와서 외곽 경계근무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사병식당에서 전방에서 온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발걸음도, 행동도, 눈빛도 행정업무를 하는 저희 동료들과는 달랐습니다. 배식과정에서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렸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전방에서 온 군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소위 ‘당나라’ 군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타듯 대충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순교는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 받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이 신앙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기도 했고,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신앙 때문에 만 명이 넘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온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충실하게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들 오늘 예수님의 당부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생각해보십시오.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 우리 가정을 풍비박산 낸 사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든 사람,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 사랑,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려운 숙제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불가능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요 며칠 백번 천번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104주년 삼일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의 없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은 설마 하는 탄식과 함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표현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을 극도로 신임하는 것인지? 내용을 읽다 보니, 정말이지 일본 총리의 기념사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일본 내 극우파, 국내 친일파가 극찬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의 책임이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 찼던 일본제국주의에 있지 않고,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었다는 표현은, 일제 강점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그릇된 식민사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받은 상처와 손해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일본을 향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 운운하는 것은, 그들 앞에 먼저 고개를 조아리는 굴종 외교, 종속 외교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롭게 지내던 우리 집으로 옆집 사람들이 담장을 허물고 넘어왔습니다. 집안의 기둥인 듬직한 아들은 꽁꽁 포박해 끌고가 죽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도 끌고가 몹쓸 짓을 하고 팔아넘겼습니다. 집문서 땅문서를 비롯해 쓸만한 가재도구는 다 쓸어갔습니다. 성도 이름도 자기들 것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만행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데, 그 피해 가정의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일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지난 일 자꾸 되새김질해봐야 좋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이제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 다 잊고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냅시다.”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 진정성 있는 사과, 다시는 동일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 그에 따른 정확한 손해 배상!
아마도 우리는 지상 생활 내내 근원적 결핍, 근본적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는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불완전하니까요.
언젠가 우리가 지상 여정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처럼 완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0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으로 “의로움”은 무엇인가?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 에제키엘의 가르침-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130,3-4)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중 “참행복”, “세상의 소금과 빛”에 이어 당신과 율법 관계에 대해 밝히기 시작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순시기를 맞이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신한 가르침이 됩니다. 다음 서두 말씀으로 시작되는 6개 대당명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결코’입니다. 평범해선 안되고 뭔가 특별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주님은 구체적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결국은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이에 앞서 현대의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근 인터뷰중 인상적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자적인 진보적 교황님이기에 내적으로 반대파들에게 겪는 고통도 참으로 크겠다 싶었습니다.
1.“바티칸 공의회는 단지 교회쇄신의 표지만은 아니다. 그것은 쇄신의 문제일뿐 아니라, 교회를 더욱더 살리게 하라는 부르심이다. 공의회는 쇄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한다. 교회는 언제나 앞으로 향해 가고 있는 어머니이시다. 공의회는 더 큰 성숙에로, 더욱 시대의 표징과 일치되도록 교회의 문을 연 것이다.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가장 전통적이며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문헌이다. 전통적이며 언제나 현대적이다. 전통은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금요강론 사회교리 공부시 독일의 세계적 신학자 칼 라너의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교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입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나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도 자기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연민의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노모와 같은 어머니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 얼굴 사진을 보면 예전과 달리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교회 어머니의 자글자글한 얼굴에 위로를 받습니다.
2.교황님의 전쟁에 대한 견해입니다. 강대국 들의 전쟁의 이면에는 얼마나 사악한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는 현대의 예언자 교황님입니다.
“내 양친은 ‘전쟁은 미친짓이다” 자주 말씀하시곤 하셨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안마, 시리아(무려 13년 동안이다!), 예멘 등, 거기서 아이들은 교육도 빵도 없고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아이들을 부모와 함께 많이 만났다. 나는 거기서 웃는 아이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왜 이들은 웃지 않는가? 이들을 무엇을 보았는가? 그것은 공포스러운, 정말 공포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세계는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다. 이에 관하여 비난받아져야 할 것이 거대한 무기공장들이다. 부자 나라가 약해질 때, 그것은 수행해야할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말들이 있으니 다시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들이 이를 마련해 준다.”
3.“전례를 거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 교회는 성전안에 숨지 않는다. 성전안에 정착하는 것은 올바른 예배방식이 아니다. 미사거행은 결과를 갖는다. 빵을 떼어 주는 것, 이것은 사회적 의무를, 다른이들을 돌봐야함을 뜻한다. 기도와 실천은 함께 간다. 하느님 경배와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한 섬김은 함께 간다. 우리는 각 형제자매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4.“경제는 사회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시장경제에 하나 덧붙여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적’ 시장 경제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이라는 말마디를 명심해야한다. 지금 경제 위기는 정말 심각하여 전율할 정도다. 세계 대다수 사람들이 충분히 먹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다. 부(富)는 거대한 사업을 하는, 때로 착취하는 소수의 손안에 있다. 경제는 언제나 사회적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바로 현대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88세 노교황님의 예언자적 말씀이요, 이를 실천함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의로움임일 것입니다. 교회헌장은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이 염원한다”로 시작합니다. 바로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대당명제 첫째 화내지 말라 하십니다.
살인에 앞서 간접적 살인과도 같은 형제에게 성내는 일이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 비방하는 일체의 무시하는 말마디를 엄금하라 하십니다. 정말 대죄는 이런 형제들에 대한 무시나 멸시이니 애당초 마음의 순결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 대죄는 둘이니 절망과 무시입니다. 자기에 절망하면 자살에 이르고 타인을 무시하면 타살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 예물을 바치기전 형제와 우선 화해해야 하며, 고소한 자와도 재판정에 가기전 타협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비상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즉시 관계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즉각적인 회개의 실천이야말로 사랑의 지혜요, 진짜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1독서 예언자 에제키엘의 가르침이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권자로서 말씀하셨다면, 에제키엘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주님의 대리자로 말씀하십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선물입니다. 지난 일에 아파하거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다 헛일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나를 보십니다.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구원은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참으로 비상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과거의 죄악을 단칼에 단(斷)!, 끊어 버리는 단호하고도 비상한 회개의 선택을 결단하는 이들이 참으로 의로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이사야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해 가는 날로 세속화에 안주함으로 부패 분열되어가는 현대교회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에제키엘,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가 온갖 고난중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했던 분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모두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130,5-6). 아멘.
[3/4(토)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조재형 신부)
2. 그런데 어떤 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처럼 완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양승국 신부)
3.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이영근 신부)
4. 미안마, 시리아(무려 13년 동안이다!), 예멘 등, 거기서 아이들은 교육도 빵도 없고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아이들을 부모와 함께 많이 만났다. 나는 거기서 웃는 아이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왜 이들은 웃지 않는가? 이들을 무엇을 보았는가? 그것은 공포스러운, 정말 공포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세계는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다. 이에 관하여 비난받아져야 할 것이 거대한 무기공장들이다. 부자 나라가 약해질 때, 그것은 수행해야할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말들이 있으니 다시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들이 이를 마련해 준다.”
(이수철 신부)
[3/4(토)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제 70일 기도]
하느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지구촌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사랑과 자비를 나눔하소서. 아멘.
- 2023년 3월4일(토) 6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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