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5월 19일 금요일[(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말씀이신 성자께서 하신 거룩한 약속이
복음 전파로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모든 자녀가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다.
또는
◎ 알렐루야.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그분은 민족들을 우리 밑에, 겨레들을 우리 발아래 굴복시키셨네. 우리에게 상속의 땅을 골라 주셨네. 사랑하시는 야곱의 영광을 주셨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가족이 드리는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저희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영원한 선물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 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자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고진감래(苦盡甘來)’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가난과 굶주림이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길에는 넝마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냥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판자촌은 아파트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인을 보면 주눅 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쫓아서 미국으로 이민 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의료체계가 잘 마련되어 있고, 한국 사회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 뉴욕에서 4년째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한국이 지난 50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입니다. 우리가 정한 물리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어갑니다. 이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60년을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슬픔과 기쁨, 고독과 희망의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에서는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의 시간에서는 바늘 하나를 넣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좁습니다. 불평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감사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손을 이끌게 됩니다. 의미의 시간은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18.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은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격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
-치열熾㤠한 삶, 가열加熱찬 삶이 답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요한14,18;16,22)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숨통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선교를 지향합니다. 그러니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누구나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이요 밖으로는 선교, 안으로는 기도요 밖으로는 선교 활동입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성소주일 담화문중 영문해석이 잘못되었음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미션mission’을 ‘사명’이 아닌 ‘선교’로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없이는 성소도 없다’로 해야 적절했습니다. 예전 2012년 오틸리아 연합회 회의에서 요셉 수도원의 자치좌 수도원이 결정될 때 회의에서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이 생각납니다.
‘선교가 본질인데 너무 관상적이지 않느냐?’는 요지의 물음에 제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다음 한마디가 논쟁을 종결시켰고 우렁찬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선교와 관상은 둘이 아닌 하나다!(Mission and contemplatiom is one without two!)”.
흡사 ‘황소 뒷걸음 치다 쥐잡는다’는 속담처럼 순간 성령의 은총으로 생각치 않은 답변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관상은 선교 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존재자체가 복음 선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와 관상에 기본적 자세가 날로 치열한 삶, 가열찬 삶입니다. 선교의 사랑, 선교의 열정입니다. 어제 의기투합하는 도반과의 나눔이 생각납니다. 어느 동료 도반의 성취에 대한 제 견해입니다.
“학위논문이 기막히게 완벽하네요. 토마스 머튼의 모두를 망라했어요. 목숨 걸고 토마스 머튼에 빠져 자나깨나 머튼만 생각하며 참 치열히 한결같이 공부한 것 같네요. 내가 이미 참고 문헌 책을 거의 다 봤기에 물흐르듯 읽었고 그 분위기를 알지요. 내가 머튼에 대해 석사논문 쓴 것이 1988년이니 벌써 35년이 지났네요. 도반의 책 후기를 보면 캐나다 9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감동깊게 유려한 문체로 감동깊게 묘사되어 있지요! 참으로 도반이 캐나다에서 이룬 성취에 감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감을 나누니 더욱 분발심이 샘솟네요!”
이어 계속하여 보낸 제 소감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1915-1968 만53세, 프란치스코 신부 1949-2023현재 만74세, 머튼보다 21년 더 살고 있네요. 지금의 관심은 이미 머튼을 완전히 넘어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가 됐지요! 수도공동체 체험만해도 제가 머튼을 훨씬 능가했고, 머튼 참 문제가 많았던 장상도 참 힘들어 했던 명암明暗 양면을 지닌 분, 그리고 불우했던 분이지요. 물론 불세출의 천재이자 영성가임은 분명하구요. 통과해 가야할 분이지 결코 계속 머물 분은 아닙니다. 영원히 머물 분은 오직 한 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지요! 토마스 머튼은 경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결코 부러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머튼 책 안본지 참 오래됐습니다.”
어쨌든 토마스 머튼이나 논문을 쓴 도반의 공통점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열정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수도형제의 답변입니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 공부 엄하게 시키기로 유명했던 교수님 한분이 수업 마지막 시간에 남기신 다음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 아들아, 이 밖에도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코헬12,12)”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인 믿는 이들의 삶은 치열해야 하고 날로 가열차야 합니다. 하루하루 절실하고 절박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무려 아주 오래전 26년전 여기에서 써놨던 “사랑”이란 글을 여전히 공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살아온 제가 고맙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바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래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어제 오랜만에 갑작스레 면담고백성사차 방문했던 참으로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와의 만남도 생생합니다. 아름다움은 젊음의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치열한 삶에 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즉시 강복후 안아 드리며,
“자매님 자체가 제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답하고 나니 얼마나 통쾌하던지요! 이또한 선교열정, 선교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마음도 똑같을 것입니다. 보속으로는 '말씀 처방전'에 이어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성가 244장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정말 기도하듯 성가 부르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사랑을 살다가 빈손으로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은 당신 품에 꼭 안아 드리며, “사랑하는 너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도형제들과의 공동카톡방에 올린 다음 “꽃길”이란 시와 당부도 생각납니다. 제 집무실은 천장암天藏庵의 은수처이자 선교의 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야전사령부입니다.
“내 집무실 꽃자리 주님이
계시는 곳
천국에 이르는
꽃길
저절로 난
꽃길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사이
꽃길
주님 친히 마련해 주신 사랑의
꽃길”-2023.5.5
“사랑하는 수도형제님들, 제 집무실옆 꽃길 주변의 애기똥풀꽃들 절대로 깎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길입니다. 마음 아팠던 형제자매들 면담성사후 사진찍어 드리는 힐링의 꽃길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서론이 참 길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정이, 선교활동이 참 치열합니다. 주님 사랑에서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참 치열한 삶입니다. 아테네에서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코린토에서 치열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바오로입니다. 관계되는 도반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천막을 만드는 생업과 함께 선교활동에 전념하다 도반들이 늘어나고 여유가 생기자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고 풍부한 결실을 거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입니다. 복음에서 주목할 말마디는 “조금 있으면”으로 무려 7회 나옵니다. 곧 죽음의 슬픔에 이는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파스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은총, 파스카의 축복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니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순간의 슬픔이나 불안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항구히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전념할 때 주님의 파스카 은총이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불안을 평화로 바꿉니다. 파스카 신비의 은총이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파스카 미사은총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마태28,20). 아멘.
[5/19(금)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조재형 신부)
2.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은총, 파스카의 축복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니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이수철 신부)
[5/19(금)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46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5월19일(금) 8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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