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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6월 14일 수요일[(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3개

[매묵]2023년 6월 14일 수요일[(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3개

 

입당송

시편 27(26),1-2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3,4-11
형제 여러분,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9(98),5.6.7.8.9(◎ 9ㄷ 참조)
◎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 주 우리 하느님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라. 그분은 거룩하시다. ◎
○ 모세와 아론은 그분의 사제들 가운데, 사무엘은 그분의 이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있네.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친히 그들에게 응답하셨네. ◎
○ 주님은 구름 기둥 안에서 말씀하셨네. 그분이 내리신 법과 명령 그들은 지켰네. ◎
○ 주 하느님, 당신은 그들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당신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어도, 그들의 악행은 응징하셨나이다. ◎
○ 주 우리 하느님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의 거룩한 산을 향해 엎드려라. 주 우리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

복음 환호송

시편 25(24),4.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 알렐루야.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8(17),3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콘스탄틴 대제와 성녀 헬레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신부

 

캠핑을 가면 가져가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침대, 텐트, 의자, 침랑은 개인 소지품이라 꼭 챙겨야 합니다. 물건을 꺼내는 것보다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주머니에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격이 꼼꼼하고, 차분한 신부님들은 혼자서도 쉽게 물건을 제자리에 넣는 것을 봅니다. 주머니를 좀 넉넉하거나, 크게 만들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물건은 주머니가 딱 맞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억지로 힘으로 넣으려고 하면 지퍼가 고장 나거나, 주머니가 찢어지곤 합니다. 물건은 어찌하면 다시 넣을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더 예민하기 때문에 늘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간 말을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는 성격 때문에 말실수를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사제생활 32년을 하면서도 마음 다스림은 늘 숙제로 남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비우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오늘도 마음에는 풍파가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첫 번째는 ‘Social Security Number(SSN)’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합니다. 요구되는 서류를 준비하고, 간단한 면접을 하면 우편으로 배송됩니다. 두 번째는 운전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뉴욕은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기에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자유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영주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주권을 원하지만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비자가 만료되고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하면 생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갈 수 없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신앙생활에는 ‘SSN’도 필요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필요 없습니다. ‘영주권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을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므로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오늘은 ‘참 행복’이 담고 있는 영성적 특징의 두 기둥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곧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 ‘됨’(being)의 영성과 ‘함’(doing)의 영성입니다. 전자는 우리를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요,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성이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 될 때 비로소 살게 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변화된 존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행복’에서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행위가 이 둘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있어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됨’의 영성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 행복’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곧 존재 변화로서의 ‘참 행복’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됨’의 영성은 ‘함’의 영성으로 육화하게 됩니다. 곧 존재의 영성은 실천적 삶의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실천적 영성은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으로 계속 순환, 반복하게 됩니다.
 
이를 ‘참 행복’에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로,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로, 그리고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채워짐,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앞길 주게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주시리라."(시편37;3.5)

 

어제부터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시작입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주제는 진복팔단의 참행복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덕의 여정”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결국은 살아야 할 성덕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참행복을 그대로 사셨던 예수님은 참행복의 중심中心이자 원조元祖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행복을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저절로 참행복을 살게 된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발적 기쁨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사랑하여 자발적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두차례 이를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참행복의 실천이요 성인입니다. 참행복을 살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감동깊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자 “아멘”이신 예수님을 닮아 참행복을 살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예스맨”이 “아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을 세례명으로 해도 기막히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살 때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의 삶이셨습니다. 세상의 원소금, 원빛이 예수님이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일치의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세상의 소금!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격리된 소금이라면 무의미합니다. 세상의 소금, 바로 선교가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나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세상 이웃의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니 부패로 변질變質,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듯, 제맛을 잃은 우리 삶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늘 제맛을 지닐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향기로운 매력적인 삶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늘 제맛을 지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제맛을 지니고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곳곳에 이런 세상의 소금같은 성인들이 있어 유지되고 지탱되는 세상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성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세상을 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같은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녹아 세상속에 녹아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부패되지 않고 제맛을 지니니 얼마나 멋지고 겸손한 삶인지요!

 

“맛이 갔다!”

음식뿐 아니라 변질된 사람을 빗댄 말이기도 합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가도 버릴 수 없으니 참 난감합니다.”

언젠가 들은 말인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말씀하십니다. 부패의 변질을 막아주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제맛을 지니고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빛과 같은 개인도 공동체도 있습니다. 세상의 빛! 역시 우리의 신원이며 선교는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빛이지 세상을 떠난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생생히 살아나고 환해지고 유쾌해지는 느낌이니 이런 이들이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분위기를 무겁게 불편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들도 있으니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 결핍된 이들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가정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하며 부패로 변질되지 않고 제맛을 잃지 않고 있는가?”

 

제가 자주 성찰하는 주제입니다. 부패로 변질됨이 없이 늘 제맛을 지니고 살고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요 제가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바로 참행복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정말 변질되지 않고 제맛, 제빛을 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위한 유일한 처방이자 대책은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함으로 날로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의 삶이요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이며 보람일 것입니다. 그 좋은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성인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이 불꽃처럼 강열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과 빛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이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에 입회하여 생활했으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옮겼고, 이어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심한 병으로 포르투칼로 귀국길에 올라 회항중 배는 심한 폭풍우로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에 당도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그곳 수도원에 들어갔고 후에 로마냐의 포를리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안토니오의 됨됨이를 파악한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대 그를 능가할 설교가는 없었으며 어느 학자는 성인을 ‘그리스도교의 자랑’이라 했으며 교황궁에서 한 설교는 ‘성경의 보물창고’라는 칭송도 받았습니다. 어느 분은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등으로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리미니란 곳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니 정말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습니다. 

 

성인은 만35세 짧은 나이에 병사한후 선종한 다음해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됩니다. 특히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열렬히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했느냐, 그래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아멘.


[6/14(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영근 신부)

 

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안토니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에 입회하여 생활했으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옮겼고, 이어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심한 병으로 포르투칼로 귀국길에 올라 회항중 배는 심한 폭풍우로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에 당도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그곳 수도원에 들어갔고 후에 로마냐의 포를리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안토니오의 됨됨이를 파악한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대 그를 능가할 설교가는 없었으며 어느 학자는 성인을 ‘그리스도교의 자랑’이라 했으며 교황궁에서 한 설교는 ‘성경의 보물창고’라는 칭송도 받았습니다. 어느 분은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등으로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리미니란 곳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니 정말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습니다. 

 

성인은 만35세 짧은 나이에 병사한후 선종한 다음해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됩니다. 특히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이수철 신부)

 

[6/14(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 172 기도일]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6월14일(수) 6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