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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28일 금요일[(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28일 금요일[(녹) 연중 제1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54(53),6.8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20,1-17
그 무렵 주님께서 1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1(◎ 요한 6,68ㄷ)
◎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알렐루야.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구약의 제사들을 하나의 제사로 완성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처럼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존엄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사가
인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1(110),4-5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는>
묵시 3,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해설해 주십니다. 길-교만, 돌밭-육욕, 가시밭-탐욕을 갈아엎은 좋은 땅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땅임은 어떻게 알까요? 좋은 땅은 곧 좋은 농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땅에 상관없이 씨를 뿌리고 있다면 좋은 땅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가 되게 하시려는 사람은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주님께서 뿌려진 땅은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는 땅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땅 안에 그리스도께서 뿌려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큰 사랑의 실천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가 복음을 전하는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예언자를 파견하실 때 하느님은 그에게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 3,3-4)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그 맛에 꿀처럼 답니다. 기쁨에 넘칩니다. 하지만 그것이 소화가 되면 배를 아프게 합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묵시 10,10-11)
    왜 말씀을 깨달으면 기쁘면서 동시에 배가 아플까요? 바로 그 말씀은 사랑인데 그 사랑의 기쁨을 나만 느끼는 것이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녀는 굶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꿀처럼 맛있는 것을 먹고 자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그래서 말씀을 다시 뿌리는 좋은 농부입니다. 그런데 착한 농부는 길과 돌밭과 가시밭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누가 나의 말을 무시하든 욕을 하든 공격하든 무조건 뿌립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는 더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밭이 무서워서 씨를 뿌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권한을 가진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는 지금은 목사님이 된 ‘고구마 전도왕’이라고 불리는 김기동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고구마 전도법으로 노상 전도로만 수천 명이 세례를 받게 한 인물입니다. 그도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목사님 설교할 때 중앙을 가로질러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교회를 가지 못하게 차에 태우고 두 어린아이와 함께 스키 타러 가는 중 커다란 사고가 발생합니다. 자신도 많이 다쳤지만, 그는 모두가 무사하게 해 달라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했고 하느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그를 바로 노상 전교로 데려갔고 그는 첫날 네 명에 실패하고 다섯 번째 사람에게 전교 하게 됩니다. 기도 중 그는 고구마와 감자가 삶아지는 모습을 보고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것처럼 선교 하게 됩니다. 고구마가 무서워서 젓가락으로 찌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분에게 정말로 그런 환시를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도 맞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심지어 하느님을 손 위에 얹고 그분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사람을 보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밭에 떨어져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은 모든 권능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김기동 목사는 자신이 아무 힘도 없을 때 자기 가족을 아무도 죽지 않게 해주신 그분이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믿기 때문에 전도 할 때 힘들지 말라고 주님께서 씨앗이 뿌려질 대상을 고구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좋은 농부는 땅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사람이 고구마로 보이지 않으면, 그냥 밭이나 길이나 자갈밭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 안에 권능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은 광야에서 아무 먹을 것도 없이 버티실 수 있으셨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문을 두드립시다. 
존 스타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일 복음이 그 자체가 주장하는 대로 기쁜 소식이며 또한 우리를 확신 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크루즈에는 승무원이 1,500, 승객이 5,600명 정도 탑승합니다. 승무원도, 승객도 비록 탑승의 목적은 다르지만 도착지는 같습니다. 승무원은 직업으로 탑승하면서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탑승합니다. 승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 모처럼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탑승합니다. 비행기에는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듯이 크루즈에도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등급을 정해 탑승하게 됩니다. 등급에 따라서 제공되는 음식과 편의시설이 차이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크루즈를 통해서 삶을 즐기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고급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것도 좋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최상의 등급을 이용해도 그리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몸이 편하고 모처럼의 휴가에 마음까지 들떠있다면 어떤 등급이라고 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저도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왼쪽 손목이 아프면서 눈은 경치를 보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지만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는 광야라는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불평과 불만을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감사드리라고 합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변하지 않는 북극성과 같습니다. 십계명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고, 헛된 것을 섬기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많은 축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 근본정신은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길가의 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자갈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가시덤불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의 밭이 좋은 땅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을까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마음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넘어서 참된 진리를 찾아 예수님을 찾았던 니코데모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십계명을 잘 지킨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과 그 가족들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며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한 마더 데레사 성녀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하느님을 찬양하듯이 알려지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지키면서 마음의 밭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27.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이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도처에, 그리고 제 안에 벌어진 당신 사랑을 찬양하나이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16주일 목요일.

 

개안의, 회개의, 깨달음의 여정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파스카 예수님뿐이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동방그리스도교 영성을 공부하면서 크게 배우고 깨달아 강론에 자주 인용하는  주제가 마음의 병인 무지(ignorance)와 자기인식(self-knowledge)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해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지의 탐욕, 무지의 교만, 무지의 분노, 무지의 전쟁, 무지의 두려움, 무지의 불안, 무지의 허영, 무지의 태만, 무지의 어리석음등 무지한 인간, 인간의 정의라할 만큼 우리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무지한 인간의 죄요 악행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무지한 인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이라 하는 것이며 궁극의 책임은 본인에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강조하는 회개요 깨달음이요 개안인 것입니다. 동방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소개하는 마음의 병에 대한 공부가 깊고 재미있습니다. 언젠가 나눴지만 다시 나눕니다. 우리는 자주 잊어 버리는 망각의 동물이기에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은 마음의 병은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무지(ignorance)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가 근원적 마음의 병이다. 다음은 무지와 관련된 병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forgetullness)이다. 다음은 마음의 딱딱함(hardness) 또는 단단함(toughness)이다. 또 다른 두가지는 눈멈(blindness)과 오염(contamination)이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할 수 없는데 이것이 눈멈이요 오염이다. 다음은 경솔(imprudence)이다.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받는다. 모든 마음의 병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인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참으로 겸손이요 지혜요 우리 인생은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자기인식의 평생훈련, 평생공부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은총,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개안의 기쁨을, 놀라움을 노래한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래서 평생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개안을, 회개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는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평생 훈련하고 공부해도 여전히 남아있을 무지의 어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평생 훈련하고 평생 공부해야 할 하느님 공부,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공부가 빠진, 지혜가 빠진 지식을 쌓아가는 세상 공부들 다 헛 공부입니다. 이상한 괴물이, 잔인한 야수가, 무기력한 중독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길을 잃고 해매는 교육의 난맥상亂脈相도 바로 여기서 기인합니다. 옛 동서방의 공통된 참공부는, 평생공부는 참사람이, 성인이, 군자가 되는 공부였습니다. 인문학 공부는 사라져가고 실용학 공부가 대세가 된 무지한 교육 현실입니다.

 

평생 하느님 은총과 함께 가야 할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 훈련이요 평생 공부입니다. 인생 광야 여정,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을 알아가고 자기를 알아가면 성인이지만 하느님을 잊고 자기를 잊으면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여 다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말씀이자 사랑이라 함이 맞습니다.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성서의 말씀 공부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 나라의 비유들입니다. 참행복은, 참자유는, 참평화는, 참기쁨은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 때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정화와 성화의 변화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가르쳐 주는 오늘 탈출기입니다. 모세와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엄한 순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주님께서 시나이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셨다.-

 

주님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사는 우리 수도자들과 매일 미사에 참석하는 형제자매들 오늘 탈출기의 모세와 백성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주님의 성전에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바로 이것이 전례의 궁극 목표입니다.

 

제가 늘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전례요 우리 수도원의 일과표입니다. 말그대로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게 하는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갖춘 회개의 시스템, 깨달음의 시스템, 개안의 시스템같은 일과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또한 평생 하루하루 부단한 선택과 훈련과 습관을 목표로 합니다. 개안을, 회개를, 깨달음을, 주님을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화하여 날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단 하나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결정적 예방제이자 치유제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성무일도 3시경 찬미가 2절입니다. 왜 파스카 예수님이 무지에 대한 답인지 보여줍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7/28(금)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40일간은 광야에서 아무 먹을 것도 없이 버티실 수 있으셨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지니신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문을 두드립시다. (전삼용 신부)

 

2. 우리 삶의 주변에도 십계명을 잘 지킨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과 그 가족들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며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한 마더 데레사 성녀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하느님을 찬양하듯이 알려지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지키면서 마음의 밭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도처에, 그리고 제 안에 벌어진 당신 사랑을 찬양하나이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래서 평생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개안을, 회개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7/28(금)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 216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하늘나라의 신비로 지복의 기쁨을 누리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7월27일(금) 5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