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25일 월요일[(녹) 연중 제25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본기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즈라기의 시작입니다.1,1-6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또는>
요한 10,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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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2023년 09월 25일 월요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씨가 뿌려진 땅에 비유되던 네 부류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결국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좋은 땅)만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8,15) 열매를 맺습니다.
이 비유의 설명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도 ‘말씀을 듣는’ 주제와 깊이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곧 그저 듣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들은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행동으로 열매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내며 집 안을 환히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들어오는 이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는 것은
아직 말씀에 맛 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발하는 빛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열매 맺은 사람들이 아직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들의 길을 비추며,
그들을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밝히는 등불은 그릇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여 세상을 비출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점점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지금은 숨겨져 있고 감추어진 듯 보이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결실을 거두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감추어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 곧 당신의 참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 사람을 가려서 비추는 등불은 없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한동안 선선하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습니다. 가을이 오는 것 같았는데, 9월이 시작되었는데 연일 30도가 넘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원인은 ‘인디언 서머’라고 합니다.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을 일컫는 말로,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종종 서리가 내린 후에도 이런 현상이 생긴다. 원주민들이 이 계절을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에 신이 내려 주는 일종의 축복으로 여겼다는 데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절망 가운데에 뜻하지 않는 희망을 보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디언 서머는 축복과 희망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겨울 얼어붙은 강에도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숨구멍이 있기에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군대의 행렬도 50분 걸으면 10분간 휴식이 있습니다. 10분간 휴식에 담배도 피우고, 물도 마시고, 뭉친 다리의 근육도 풀어 줍니다. 저의 뉴욕 생활에도 ‘인디언 서머’가 있습니다. 신문홍보를 위해 여러 지역을 다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구경도 하고, 신문도 홍보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상반기에는 LA, 토론토, 보스턴엘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도 ‘인디언 서머’입니다. 일상의 삶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강가에서 부른 노래가 시편 137장입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간 것에 대해서 절망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좌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성찰을 하였고,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인디언 서머’가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 왕 키루스입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키루스의 선포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유배를 마치고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 그때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께서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 저희의 운명을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신앙인은 누구나 ‘인디언 서머’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고,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행동이 지친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는 이웃을 위한 ‘인디언 서머’가 되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4. 연중 제25주일.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3)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곧 자비의 나라임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자비로우신 분임을 자비를 드러내주며, 동시에 그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자비와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를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제2 이사야의 말씀인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자비”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 지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 곧 그 당시 서민가정의 하루 식비를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아침 9시, 12시, 3시, 5시에도 나가서,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합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도대체가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계산이라고는 아예 모릅니다. 이는 주인이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과 자비”입니다. 그 “은총과 자비”는 하느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과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도 벌어지는 이 “은총과 자비”에 우리는 기꺼이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주인은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이처럼, 굳이 늦게 온 이들부터 같은 품삯을 주는 이유는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꼴찌”가 먼저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부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코 순서를 따질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비도 그가 나와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가를 찾아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무관할지라도 먼저 필요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셋째>로는 주인은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늦게 온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까지 같은 일당을 쳐 줍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관념으로 보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셈해주었을 뿐입니다. 결국, 먼저 온 이든, 나중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자비의 베푸심입니다. 곧 그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자유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의 합리성에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주권적이 자유를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자비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자비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총과 자비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제2독서>인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쓴 [필립비서]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필리 1,20)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이 베푸신 자비의 마음’을 지녀냐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하느님 생각과 빗나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서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타자를 앞세우는 자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이 손해보고 훼손되는 자비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실행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말로는 그리스도인일지언정 실천적으로는 비신앙인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타자를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일
-“주님 사랑, 주님 시야 지니기, 하늘나라의 실현”-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사용한 강론 주제가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라는 것이요,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 등 끝이 없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왜관 수도원 서울 봉헌회 세 번째 강의는 희망의 여정이었고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희망의 순례자라는 신원임을 강조했습니다.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보면,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의 현재의 시점이 그대로 확인된다는 것이며, 이를 확인할 때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피정하시는 분들에게 제시해봤더니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지만, 대부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3-4시쯤,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가을쯤의 시점에 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절실하게 와닿는 물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이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참으로 믿는 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수시로 자문하며 삶을 재정비하고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마음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첫째 우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제2독서 필리비서를 통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래서 어느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삶과 죽음,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 관계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어 우리 모두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물음을 자주 환기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때때로 주님께 즐겨 바치는 사랑의 고백기도도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주님의 시야를 지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날로 자아초월의 삶이요 그 이해 지평도, 내적 시야도 날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을 때, 우리 하느님께 돌아올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시야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옳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있다.”
참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 때 은총처럼 선사되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내외적, 영적 시야요 지평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꿈은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하늘 나라 꿈의 실현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밭임자가 상징하는 바, 원대한 하늘 나라의 꿈을 지니신 하느님이요 예수님이십니다. 밭임자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를 참으로 확장케 하는 충격적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대로 어느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일치합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비전입니다. 누구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의 참으로 자비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와 공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릅니다. 오전 일찍 온자와 오후 늦게 온 이에 대한 똑같은 급료의 지급을 인간적 잣대의 정의나 상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임을 입증합니다. 바로 아침 일찍 왔다 오후 늦게 도착한 이에 대한 예수님의 후한 처사를 이해 못하는 자, 참으로 사고의 전환이, 회개가 절실합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자리를 찾아 한데나리온 받은 자에게 많은 식솔이 딸렸다면 그의 보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편협한 사람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에 대한 이분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지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한에 월권하지 말고 네 분수에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시야를 지닐 것을 촉구하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기본권리를 누리며 살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배워야할 바 주님의 이런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이해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이 하늘 나라에서 언제나 첫째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요즘 널리 회자되며 서서히 실행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봅니다. 이런 취지로 생긴 기본소득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정신과 그대로 일치되는 민생정치에 중점을 주는 하늘 나라 실현에 일조하는 정당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마음을 통해 온전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 하늘 나라의 실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넑고 깊은 내적 시야를 지니고 살고 싶습니까?
주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저절로 우리의 영적 시야와 지평도 날로 확장되어 주님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하느님을,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밭 주인처럼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현실화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9/25(월)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빛을 밝히는 등불은 그릇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여 세상을 비출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점점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됩니다.(정천 신부)
2.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번져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셔서 둘의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합니다. 사랑도 받아야 할 수 있는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마치 등불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전삼용 신부)
3. 신앙인은 누구나 ‘인디언 서머’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고,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행동이 지친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는 이웃을 위한 ‘인디언 서머’가 되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조재형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서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지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한에 월권하지 말고 네 분수에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시야를 지닐 것을 촉구하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기본권리를 누리며 살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이수철 신부)
9/25(월)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275일 기도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점점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9월25일(월) 6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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