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27일 수요일[(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
본기도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즈라기의 말씀입니다.9,5-9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5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6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7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9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그분은 벌을 내리시지만, 자비를 베푸시고, 깊은 저승으로 내리기도 하시지만, 무서운 파멸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그분 손에서 벗어날 자 아무도 없으리라. ◎
○ 그분은 너희를 민족들 사이로 흩으셨지만, 바로 거기에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셨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서 그분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은 우리 주님, 우리 아버지, 영원하신 우리 하느님이시다. ◎
○ 이제 너희에게 베푸신 것을 보고, 소리 높여 그분을 찬양하여라. 의로우신 주님을 찬미하고, 영원하신 임금님을 높이 받들어라. ◎
○ 나는 이 유배의 땅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죄 많은 민족에게 그분의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리라. ◎
○ 죄인들아, 돌아와 그분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여라. 그분이 너희를 받아들이시어, 자비를 베푸시지 않겠느냐?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9,35-38)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성사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빈첸시오의 모범과 전구로 도움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성자를 본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함 승수 신부님 강론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 루카 9,1-6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떠날 때도 바리바리 짐을 챙겨가는 우리들입니다. 2박 3일 캠프를 가는데도 손에는 캐리어 등에는 백팩 아주 난리도 아니지요. 먹을 것, 입을 것은 기본이고 휴대폰, 충전기, 보조배터리, 화장품, 세면도구 등등. 그렇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잔뜩 가져갔다가 한 번 꺼내보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가져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 모습을 두고 누군가는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미련하게 고생을 사서 한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볼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예수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아마 준비성을 칭찬하시기보다는,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는 우둔함을 책망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며칠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말 그래도 짧은 ‘여행’입니다. 집에 있을 땐 집에서 할 일이 있고, 여행지에 가서는 여행지에서 할 일이 있지요. 여행지에 갔으면 조금의 불편함은 감수하더라도, 그곳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을 것들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여행지에 가서까지 일상에서 누리던 편리함과 안락함을 누리려고 이것저것 다 챙겨간다면, 그 짐의 무게에 짓눌려서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잠시 여행을 떠날 때에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비우고 내려놓지 못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향해 완전히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따를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선포의 여정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기대고 애착하면 몸도 마음도 거기에 묶여서 주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완전한 ‘빈손’의 상태에서 철저하게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양손 가득 담을 수 있게 두손을 완전히 비워두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상의 축복보다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중의 일’이고 일단 지금은 세상의 것들을 즐기며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깨어있지 못한 상태로 흐리멍텅하게 사느라,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있음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런 모습을 ‘욜로’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려고 들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지금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를 가불하며 사는 ‘욜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은총 안에서 과거-현재-미래를 한결같은 성실함과 충실함으로 사는 ‘카르페 디엠’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변수를 줄이고 더 철저하게 대비하여 걱정하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챙기지만, 그건 지금의 걱정을 또 다른 걱정으로 덮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가지고 있는게 늘어나봐야 그만큼 걱정거리만 더 늘어날 뿐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를 수 있다면 나머지 부수적인 것들에 연연할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을 알아서 충만하게 채워주실테니, 우리는 그저 그분께서 맡겨주신 소명들을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가면 됩니다. 오직 참된 믿음으로만 걱정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조재형 신부 강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야훼이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 그때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또 묻습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신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숫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야훼이레’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두 ‘야훼이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파랗게 빛나는 지구라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80세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에게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광야를 건너는 ‘이정표’입니다. 판관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판관들은 이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었습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불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야훼이레’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던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서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물자와 사람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페르시아의 왕들은 ‘야훼이레’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야훼이레는 나자렛에 살던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우리들 또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야훼이레’입니다. 돌아보면 제게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가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가 32년 동안 사제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야훼이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함께 지내는 동료사제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펜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교우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었습니다. 4년 동안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야훼이레’입니다. 직원들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홍보를 다닐 수 있었고, 신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야훼이레’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의 눈으로 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야훼이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야훼이레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26.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마태 12,49)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마르 3,34)로, 그리고 여기 <루카복음>에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군중”으로 제시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를 맡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어머니가 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주님의 전사답게, 학인답게, 형제답게, 자녀답게 삽시다"-
지난 주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God’s love is boundless)”, 정말 평생 끊임없이 노력해야할 하느님의 사랑 닮기입니다. 계속되는 총체적 위기, 총체적 난국의 사회요 나라입니다. 도처에서 힘들다, 아프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광야인생여정, 길을 잃고, 빛을 잃고, 꿈과 희망을 잃고, 중심을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병든 이들이, 거칠고 사나운 괴물같은 이들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건 살아있어도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살기 힘들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라 합니다.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 유망하다는 참 혼란스럽게 하는 뉴스입니다. 믿는 이들이 아니라 해도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본연의 참나를 찾아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참 절박한 시절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잠깨어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과 주모경을 바친후 만세육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도 아랫집 어른 수녀님 면담 고백 성사후도 역시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 드리고 애국가 1절만 기도하는 마음,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같은 애국가를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마음도 숙연해지고 감동하게 됩니다. 모두 한동포, 한가족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참가족”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종교 유무를 떠나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이요 예수님의 참가족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앎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인간이 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막연한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하느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 참 나를 알게 되어 겸손과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삶에 저절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뒤따르게 됩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처방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뿐임을, 또 어느 때보다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각자도생, 지옥같은 작금의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즈라기 말씀이 우리에겐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 키루스에 이은 다리우스 페르시아 임금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집을 짓도록 적극 도와주니 성전 준공과 봉헌에 파스카 축제의 거행입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의 하느님 중심의 정체성 또렷한 삶을 위해서는 보이는 가시적 중심인 하느님의 집에서의 공동전례는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일치의 중심, 일치의 구심점이 없으면 한가족 공동체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톨릭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공동미사전례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이 아닌 그 무엇이, 그 누구가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을런지요! 공동체든 개인이든 중심의 부재나 상실보다 큰 재앙도 없습니다. 세상 우상들이 그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잡으면 사람은 급기야 괴물이 되고 폐인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하느님 집 성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하느님의 집 성전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요 우리 각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또 각자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모습은 그대로 불가시적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을 상징합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님의 반응이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이 주님의 참가족임을 검증하는 잣대가 됨을 봅니다.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실현시켜 주는 구체적 항구한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주님의 학인답게, 주님의 형제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평생교육과 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주님 중심의 참가족, 한가족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평생교육에 날마다 거행하는 매일미사 수행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좌우명 고백기도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한결같이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주님의 자녀(子女)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성스런 주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9/27(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그리스도인은 지금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를 가불하며 사는 ‘욜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은총 안에서 과거-현재-미래를 한결같은 성실함과 충실함으로 사는 ‘카르페 디엠’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을 알아서 충만하게 채워주실테니, 우리는 그저 그분께서 맡겨주신 소명들을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가면 됩니다. 오직 참된 믿음으로만 걱정을 이길 수 있습니다.(함승수 신부)
2.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야훼이레’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두 ‘야훼이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야훼이레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하십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이 주님의 참가족임을 검증하는 잣대가 됨을 봅니다.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실현시켜 주는 구체적 항구한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주님의 학인답게, 주님의 형제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평생교육과 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주님 중심의 참가족, 한가족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신부)
[9/27(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제277 기도일]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야훼이레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아멘.
- 2023년 9월27일(수) 20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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