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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25일 토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25일 토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순교자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6,1-13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2-3.4와 6.16과 19(◎ 15ㄷ 참조)
◎ 주님, 당신의 구원에 환호하오리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찬송하며,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
○ 제 원수들이 뒤로 물러가고,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져 갔나이다. 당신은 민족들을 꾸짖으시고 악인을 없애셨으며, 그 이름을 영영 지워 버리셨나이다. ◎
○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3(72),28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교우들과 함께 지 세실리아 수녀님의 금경축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 후에는 본당에서 준비한 조촐한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1973년에 첫 서원을 하였고 어느덧 50년이 지났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30년이 넘는 인연을 이어온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우들이여 생각건대 이번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수녀님도 지난 50년 동안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을 지혜와 열정 그리고 기도와 헌신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금경축 축하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다양한 능력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듯이 수녀님도 수녀님의 내면에 많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은 낯선 미국 땅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교사로서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50살 밖에 안 돼 보이는 수녀님이 벌써 수도생활 50주년이라니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미사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의 사제가 함께 하였습니다. 시몬 신부님은 3년 후에 금경축이고, 강론을 하였던 브로스논 신부님은 8년 후에 금경축이고, 저는 18년 후에 금경축이고, 가비노 신부님은 계산은 하지 않았는데 대략 33년 후면 금경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제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제게 부지런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날 수 있기에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높은 목표를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교회의 직무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못하면 다음 분들이 이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협조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려 하였고, 나쁜 기억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불굴의 의지와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경축을 맞이하는 수녀님처럼 다양한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능력과 업적으로 제국을 세웠던 왕들도, 이름 없는 산골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도 부활 이후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능력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 모두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 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마카베오 상 6,1-13    루카 20,27-40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을 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 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전정화의 일상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건물보다도 사람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건물의 성전이라도 거기 좋은 신자가, 좋은 공동체가 없다면 참으로 허전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때론 박물관처럼 무덤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날로 텅비워져가는 성전이나 번창했다가 사라져 흔적만 남은 오래된 폐사지(廢寺址)를 찾을 때마다 절로 젖어드는 비애감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성전인 거룩한 신자가, 거룩한 공동체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가 되기를, 또 좋고 거룩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욕심의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살아있는 성전인 나부터, 공동체부터 날마다의 성전정화가 으뜸 수행입니다. 말그대로 성전정화의 일상화입니다.

 

어제 나눴던 “겨울 배나무 예찬” 고백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많이 보완된 완결된 고백 기도시 같은 글이요, 참 좋고 거룩한 살아 있는 성전의 사람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고백시요, 배밭 수도원이라 일컫는 요셉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뿐 아니라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넓은 의미에서 요셉 수도원의 한가족같은 모든 분들에게도 와닿는 고백시라 믿습니다.

 

-어쩜 저리도 담담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초겨울 밤하늘 별들은 더욱 빛나고 

 땅에서는 하늘 냄새가 난다

 

 그 크고 탐스러운 배열매들 모두 선물로 내놓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봐주지 않아도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

 묵묵히 침묵중에 말없이 책임을 다한 후

 

 날마다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무념(無念),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겨울 텅빈 사랑의 배나무들

 텅빈 허무(虛無)가 아닌 텅빈 충만(充滿)의 사랑이구나

 참 평화롭다, 놀랍다, 감동스럽다, 부끄럽다

 

 겨울 배나무들아

 너야 말로 내 겸손의 스승, 평화의 스승이구나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배나무들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구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성전정화의 일상화로 날마다 이렇게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짜 성인이요 살아 있는 참 좋고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걸어다니는 성전입니다. 어제 저는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루시아 자매인데 평상시에도 눈길이 갔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제 뜻밖에도 2주간에 걸쳐 기도하며 손수 손으로 뜬 겨울 쉐터를 저에게 선물했고 이 털쉐터를 입고 강론을 씁니다. 더불어 감동적인 실화도 전해주었습니다.

 

-제 친구가 몇 년전 여기 별내 신도시에 사는, 암투병중인 오빠를 찾아 간병하며 때로 요셉 수도원을 찾았답니다. 그때는 배꽃이 피기 1-2주전 정도는 될 것입니다. 친구는 병색이 짙은 오빠와 함께 수도원을 방문했고 마침 배밭에서 일하던 마르코 수사님이 배꽃봉오리들이 많이 달린 배가지 하나를 잘라 주며 당부했다 합니다. 

 

“이 배나무 가지를 병에 꽂아 놓으면 얼마후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과연 말그대로 얼마후 꽃병에 꽂은 배나무가지에서 흰 배꽃들이 활짝 피어나던 날, 친구분의 오빠는 참 편안하게 배꽃을 보며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아직 수사님에게는 알리지 못했지만 곧 전해드릴 것입니다.-

 

참 귀한 겨울 털쉐터 선물과 더불어 아름다운 실화를 선물해준 살아 있는 성전같은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수도원에서 걸어다니며 일하던 살아 있는 성전인 수사님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병자인 오빠가 활짝 핀 흰 배꽃을 보며 선종했다니 그대로 부활로 직결된 죽음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 주제도 성전정화입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우선 착수한 것은 공동체의 중심인 성전정화였습니다. 이민족들이 더럽혔던 제단을 다시 정화하여 봉헌한 것입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으며 무려 봉헌축제는 여드레 동안 계속됐다 합니다. 역시 축제의 이스라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하루하루 날마다 성전정화가, 성전정화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이들을 내쫓으시는 성전정화 활동후 본연의 "가르치는" 사명을 다하십니다. 루카복음 사가가 즐겨 쓰는 용어가 “날마다”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날마다 말씀 공부의 일상화를 통해 살아 있는 성전정화는 이루어집니다. 살아 있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와 정화로 깨끗해 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개인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음 두 문장에서 “날마다”란 말이 나옵니다.

 

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 갈 때 저절로 이뤄지는 성전정화입니다.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루카11,3)

새삼 가톨릭 교회의 평생 교육 시스템에 감동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 은총은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 살아 있는 성전정화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지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참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물론 날마다 죽을 때까지 순교적 삶에 충실했던 성인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될 뿐 아니라 부단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이분들의 생애와 삶이 우리에게는 늘 신선한 도전이자 자극이 되며 성전정화의 일상화에도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오늘은 베트남 순교 성인들 축일입니다. 우리보다 200년 정도 앞선 1533년 복음이 전래된 이후 거의 200년 동안 13만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교회입니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 순교성인들의 구성도 참 다양합니다. 96위의 베트남인들과, 11위의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 선교사, 10위의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스페인과 프랑스 출신의 주교들, 50위의 사제들(스페인과 프랑스13, 베트남37), 59위 베트남 평신도 도합 117위 순교성인들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6월19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의 동료순교자들을 시성했고, 이들의 축일은 11월24일 오늘로 기념하도록 보편 교회 전례력에 포함시켰습니다. 참으로 오늘 성 안드레아 둥락을 비롯한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거룩하고 치열했던 신앙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화함을 느낍니다. 

 

참으로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전사”답게 하루하루 날마다 순교적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저절로 성전정화의 일상화도 이뤄질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공동체는 물론 우리 모두 하나하나를 정화해주시어 참으로 살아 있는 성전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11/25(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사랑하면 보이나니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분노와 미움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조재형 신부)

 

2.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참으로 오늘 성 안드레아 둥락을 비롯한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거룩하고 치열했던 신앙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화함을 느낍니다. (이수철 신부)

 

11/25(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336일 기도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천상에서 살아갈 모습으로 살게 하소서.

 

- 2023년 11월25일(토) 6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