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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27일 월요일[(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27일 월요일[(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85(84),9 참조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본기도

주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시작입니다.1,1-6.8-20
1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2 주님께서는 유다 임금 여호야킴과 하느님의 집 기물 가운데 일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신아르 땅, 자기 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물들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넣었다.
3 그러고 나서 임금은 내시장 아스프나즈에게 분부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데려오게 하였다.
4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이 잘생기고,
온갖 지혜를 갖추고 지식을 쌓아 이해력을 지녔을뿐더러
왕궁에서 임금을 모실 능력이 있으며,
칼데아 문학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5 임금은 그들이 날마다 먹을 궁중 음식과 술을 정해 주었다.
그렇게 세 해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임금을 섬기게 하였다.
6 그들 가운데 유다의 자손으로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있었다.
8 다니엘은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기가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내시장에게 간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장에게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
10 내시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나는 내 주군이신 임금님이 두렵다.
그분께서 너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하셨는데,
너희 얼굴이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보다 못한 것을 보시게 되면,
너희 때문에 임금님 앞에서 내 머리가 위태로워진다.”
11 그래서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청하였다.
그는 내시장이 다니엘과 하난야와 미사엘과 아자르야를 맡긴 사람이었다.
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감독관은 그 말대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았다.
15 열흘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이 궁중 음식을 먹는 어느 젊은이보다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과 술을 치우고 줄곧 채소만 주었다.
17 이 네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에 능통하게 해 주셨다.
다니엘은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18 젊은이들을 데려오도록 임금이 정한 때가 되자,
내시장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앞으로 데려갔다.
19 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 그 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다니 3,52ㄱ.52ㄷ.53.54.55.56(◎ 52ㄴ)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 환호송

마태 24,42.44 참조
◎ 알렐루야.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명에 따라 바치는 이 거룩한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7(116),1-2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또는>
마태 28,20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입은 적게 열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선배들이 말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적당히 지갑은 열수 있을 만큼 채워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신문사의 구독신청서를 보내주는 봉사자들과 식사가 있었습니다. 칠레와 호주에서 온 신부님들과의 식사도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과의 모임도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제가 첫 본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 찾아오셨습니다. 임진강에는 매운탕이 맛있다고 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먼 길을 오셨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가시는 길에 제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가난한 과부처럼 저도 과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기쁜 마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아나니야, 미사엘, 아자르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야채와 물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살도 찌고,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재물과 시간과 능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두 번째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어도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셨던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10월에 꾸르실료 체험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체험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체험을 하시는 분들이 가난하지만 정성껏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말로는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위선과 가식에 가득찬 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봉헌은 많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2. 2023년 11월 27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이번 주 제1독서로 다니엘서가 봉독됩니다전례력의 끝자락에 읽는 이 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합니까?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 가운데 비교적 나중에 쓰인 책으로 분류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저자는 이 책을 알고 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1마카 1,54; 다니 9,27; 11,37 참조).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시드인들이라 불리는 경건한 유다인 그룹에 속하는 듯 보입니다.

현재 상황을 뒤집으시며 당신 통치를 확립하실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고아직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만큼 적극적으로 이교 풍습에 저항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니엘서는 당시 통용되던 두 가지 문학 유형(‘학가다라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으로 이루어집니다.

교훈적 이야기는 신학적도덕적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독자에게 제공하고자 활용되는 방식으로이야기 속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파악하여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신앙적 박해와 세상 권력이 현실에서 득세하는 현재 상황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실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많은 상징과 함께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안에는 고통받는 선인에 대한 위로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교차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곳곳에 있는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그리고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왜 왕이며, 어떤 왕일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전례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세상 권력의 다스림과는 분리시킵니다.

곧 세 개의 독서는 ‘돌봄과 사랑’, ‘죽음을 쳐부숨과 살림’, 그리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왕권’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에제케엘 예언자가 예고한 ‘왕이신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줍니다.”

(에제 34,16)

곧 양떼를 먹이시고 보살피시며, 공정으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 모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1코린 15,24)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대비하게 해주는 동시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줍니다.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중증 뇌성마비 환자입니다. 

이 시가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입에 펜을 물고 쓴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내용이 더욱 절절해집니다. 

이 시에는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그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을 하겠습니다.”라고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처럼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이는 마지막 때 우리가 맞이할 '심판'의 기준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기도나 신비 체험이나 관상이 아니라, 기적이나 예배나 성사나 봉사가 아니라, 오직 ‘사랑의 실천’임을 밝혀줍니다.

 

이를 한스 폰 우르 발타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는 기준은 ‘그가 얼마나 종교적 체험을 했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과 이웃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심판'에서도,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은 무슨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곧 사랑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주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작은이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하루하루, 날마다, 늘, 끝까지. 한결같이, 평생을”-

 

오늘이 흡사 모든 보물을 다 품고 있는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같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33주일이자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며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12,12)라는 주제로 참 멋지고 풍부한 담화도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희망과 기쁨의 왕이시며 이런 주님을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해 성서공부는 필수입니다. 이번 성서주간에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이고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바로 여기 요셉 수도원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바로 어제 생전처음 수도원에 피정 왔다 떠난 개신교 자매님에게 수도원은 “살아 있는 보물창고” 같다며 내년 달력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하여 “보물창고”라는 시를 보내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나무 한 그루 있지

 날아드는 새들 따스하게 맞아주고 편히 머물도록 품어주는

 늘 거기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있지

 나무가 주는 푸르름과 싱그러움

 열매와 그늘 사그락 잎사귀 소리마져도 모두 보물이지

 늘 한 영혼 기다려주는 나무 한 그루

 바로 모든 이의 보물창고” 

  -2023.11.25. 프란치스코 수사님의 말씀 듣고 염혜영-

 

더불어 생각나는 26년전 “사랑이란 이런 것”이란 자작시였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이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한 그루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보물창고 같은 수도원이요 제가 소망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제 그 자매에게 “하늘과 산”이라는 시집과 “겨울 나무 예찬”과 더불어 “시가 찾아 왔네!” 이라는 시도 선물했습니다. “시가 찾아왔네!”라는 시 전문도 그리스도왕 대축일 선물로 나눕니다. 그대로 일편단심 사랑해온 그리스도왕께 드리는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기가 그리스도왕이 제정되던 1925년 때와도 흡사한 작금의 세계입니다. 1925년 그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얼마후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해 세상이 중심을 잃고 암흑의 혼돈중에 있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교황 비오 11세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중심이자 왕으로 선포하는 대축일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중심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하다 마침내 1239년 세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9.1.부터 시작되 전쟁은 1945.9.2.까지 무려 만 6년 동안에 세계는 폐허가 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지 78년이지만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전쟁이요 오늘 역시 세계는 중심을 잃고 혼돈중인 참 위태한 상황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을 더욱 필요로 하는 절체절명의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는 지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은 이처럼, 우리를 끝까지 언제나 돌보고 섬기는 착한목자입니다. 

 

결코 폭압적으로 위압적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독재자 임금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전례기도시 아름답고 감격적인 말마디들도 우리를 기쁨으로 뛰놀게 합니다. 우리 여기 수도자들은 다음 장엄한 초대송 후렴 고백으로 대축일을 활짝 열었습니다.

 

초대송;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와 시편 두 개의 후렴 노래 역시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찬미가; “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한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 수 있는 임이여”

 

후렴1; “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

후렴2;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있으소서”

 

세상이, 우리 삶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은, 두렵고 불안한 것은 삶의 중심이 분명치 않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나라”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길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하는 그리스도왕의 모습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자 일꾼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은혜롭습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새롭게 명명하면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모두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왕의 축일을 최고 등급의 대축일로 격상했고, 이어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3주일에 배치함으로 이날 모든 것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참 좋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착한목자 그리스도왕이시며,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분의 뜻을 자발적 기쁨으로 기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을 통해 착한목자 우리 주 그리스도왕의 마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개한 착한목자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니까? 주님은 곤궁중에 있는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며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듯,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1.굶주린 이들, 

2.목마른 이들, 

3.나그네들, 

4.헐벗은 이들, 

5.병든 이들, 

6.감옥에 갇힌 이들”

 

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거론하시며 바로 이것이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못박습니다. 심판의 잣대는 결코 자폐적 자기만족의 전례생활도, 관상생활도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착각의 엉뚱한 짝사랑입니다.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오는 삶의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증발된 전례나 관상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의 참으로 부끄럽고 헛되고 공허한 위선적 신성모독 행위이겠습니다. 

 

전례나 관상의 진위는 반드시 어떤 형태든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참으로 역겨워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결핍된 위선적 거짓 관상, 거짓 거룩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예화는 기존의 제반 종교를 심판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입니까? 혹은 버림 받은 왼쪽의 염소들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인종, 종교, 문화, 언어, 국적,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모두를 내 형제들이라 하며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십니다.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이런 가난한 주님의 형제들인 주님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주변 모두가, 특히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요, “주님의 얼굴”인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 만나는 주님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후자가 빠진 전자의 미사뿐이라면 반쪽의 미사뿐일 것입니다. 미사전례를 통해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이요 온전한 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벌이나 영원한 생명 역시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추호도 온 누리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진리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아멘.

 


[11/27(월)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의 제단에 정성껏 봉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랑입니다. 재물과 시간과 능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두 번째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어도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셨던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2. 다니엘서 안에는 고통받는 선인에 대한 위로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교차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곳곳에 있는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그리고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김상우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인종, 종교, 문화, 언어, 국적,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모두를 내 형제들이라 하며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십니다.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이런 가난한 주님의 형제들인 주님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주변 모두가, 특히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요, “주님의 얼굴”인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1/27(월)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 338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사랑.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두 번째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어도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셨던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 2023년 11월27일(월) 11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