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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3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3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본기도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 사울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9,1-4.17-19; 10,1
벤야민 지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키스였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고 츠로르의 손자이며,
브코랏의 증손이고 아피아의 현손이었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2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4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견자의 댁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들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일러 주겠소.”
10,1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대중 라틴 말 성경』에 있다.

화답송

시편 21(20),2-3.4-5.6-7(◎ 2ㄱ)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나이까! 당신은 그 마음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그 입술의 소망 내치지 않으셨나이다. ◎
○ 은혜로운 복으로 그를 맞이하시고, 그 머리에 순금 왕관을 씌우셨나이다. 그가 당신께 살려 달라 빌었더니, 영영 세세 긴긴날을 주셨나이다. ◎
○ 당신 구원으로 그 영광 크오며, 당신이 존귀와 영화를 내리시나이다. 그를 영원한 복이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6(35),10 참조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또는>
요한 10,1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인터넷 세상의 힘을 실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운동 중에 한 분이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핸드폰은 예전에 허각이 천 년을 살아도 그대 사랑하는 마음뿐인 바보 였죠. 그대 핸드폰이 난 너무 부럽습니다. 지금도 니 옆에 같이 있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모두가 소중하게 여기는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한분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애플에 접속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핸드폰의 위치가 지도 위에 깜빡거렸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이지만 알람을 울려주는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복사기의 토너를 갈아야 했습니다. 저도 직원도 방법을 몰라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문제없다고 하면서 복사기 토너 가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친절하게도 복사기 토너를 가는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영상을 보면서 쉽게 토너를 갈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잘 들리다가 한 쪽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사야 하나 걱정이 컸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친절하게도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방법대로 하니 양쪽이 모두 잘 들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면서 사울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암나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원수들의 손에게 구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코 2,13-17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

 

오랜 세월 보육원에서 사목하신 수녀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이 키우신 한 아이가 주먹 세계의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전화를 준답니다.

 

“수녀님, 저예요. 힘든 일 없으신가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참으로 특별한 상황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답니다.

 

언젠가 한 건물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새까만 정장 차림의 어깨들이 입구부터 시작해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얼굴들도 한결같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조폭 두목쯤 되는 사람 부모님의 축하연 자리였던가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들의 삶은 오늘날 조직원들과 유사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의 기둥이 공포에 덜덜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인간 말종으로 여겨지던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근-현대사 공부를 위해 <서울의 봄> 영화와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 기념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라고 권합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내보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상가 반열에 들 수 있는 참 탁월한 위인이요 말그대로 전설적 신화적 인물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정치했던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니셨던 분입니다.

 

이상주의자냐 현실주의자냐? 좌파냐 우파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다 아우르기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절대적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이 이상주의적 측면이라면 상인적 현실감각은 현실주의적 측면입니다. 이 둘을 아우를 때 모두가 선망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라 함은 이 둘을 아우른 경지라 할 수 있고,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한 성 베네딕도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늘 전쟁의 위기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참으로 절실한 분별의 지혜요 이런 양극단을 아우른 통합적 사고이겠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명심하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영성과 현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진정 이상주의자라면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바로 예수님이, 성 베네딕도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모범이겠습니다. 지도자가 지녀야할 우선적 덕목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분별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률적으로 한 잣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잣대를 필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정의와 공정을 외친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시인이었음은 바로 이들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을 입증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인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멋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일 것입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은총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신자들이 되게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분별의 지혜를 지닌 예수님을 닮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일수록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뜻도 이상주의자이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을 보면 성인이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섬세한 배려의 인물인지 감복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느님 찬미도 생각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의 하느님의 진면목을 대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라면 땅에서의 평화의 현실주의자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70대 넘어서면서 집중해 보는 것이 자서전과 평전입니다. 참 감명깊었던 평전중 하나가 병자호란시 나라를 구한 충신, <최명길 평전>입니다. 당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참 치열했던 때입니다. 주전파이자 명분론자 김상헌이 있었다면 주화파이자 실리론자 최명길이 있습니다. 만일 주전파 김상헌의 말을 들었다면 조선은 신흥 강국 청나라에 초토화되어 재기 불능했을 것입니다. 아니 진작 분별의 지혜를 발휘했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도 막았을 것입니다. 천만다행 늦게나마 인조가 최명길의 편을 들어 나라를 살렸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나라의 존망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오늘에 주는 교훈이 참 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셔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저렇게 할 수 뿐이 없을까 하는 회의도 듭니다. 그렇게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죽었는데... 승패에 관계 없이 모두가 패한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물론 추호도 패권국가 러시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우선적 책무는 안보요 전쟁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전쟁나면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갑니다. 정말 한반도는 역사상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 이상 전쟁은 없기를 바라며 기상하자마자 부르는 만세칠창중 세 번째 만세입니다.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최명길 평전> 겉표지에 말마디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그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망국의 벼랑 끝에서 나라를 구한 외교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린 정치가”, 명분도 좋지만 살아야 명분도 있지 죽으면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이런 묵상을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내용 덕분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이상주의자 사무엘과 주변의 엄중한 상황에 위기 의식을 느낀 현실주의자 이스라엘 원로들의 의견이 첨예한 대립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사무엘이 언짢아 마음에 그대로 전달했을 때 주님의 반응입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백성이기는 하느님도 없는 듯 합니다. 왕정제도를 고집하는 원로들의 현실주의를 탓할수만도 없고, 하느님을 섬기고 따르는 이상주의를 고수하기도 힘드니 백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의 폐단을 상세히 열거합니다만 백성들의 결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하느님의 이상주의에 대한 백성들의 현실주의의 승리입니다. 폭군(暴君)이나 암군(暗君), 혼군(昏君)이 아닌 세종대왕 같은 성군(聖君) 만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 현실 아닙니까?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다방면에 천재라 일컬었던 조선의 두 성군인 세종과 정조는 결코 신하들에게 휘둘렸던 문약(文弱)한 인물이 아녔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극복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가는 하느님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 좋은 동료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동료인 중풍병자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것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첩첩의 군중을 뚫고 주님께 이를 길이 없음이 현실입니다. 궁즉통(窮則通)! 바로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상(理想)의 현실화(現實化)를 가능하게 한 믿음의 기적입니다.

 

네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이들의 믿음의 눈이, 지혜의 눈이 열려 이들은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내니 그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의 2차에 걸친 전인적 치유선언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듯이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는 우리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가 뒤를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모두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니 해피엔드로 끝나게 하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군중들의 믿음에도 큰 자극이자 도전이 됐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주님을 닮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함을 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 중풍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애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아멘.


1/13(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듯이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는 우리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가 뒤를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이수철 신부)

 

1/13(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385(제15)일 기도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참된 행복을 알게 하소서.

 

- 2024년 1월13일(토) 10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