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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2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2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연중 제2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증언하는 장면을 전해 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며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3,3ㄴ-10.19
그 무렵 3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0(39),2ㄱㄴ과 4ㄱㄴ.7-8ㄱㄴ.8ㄷ-9.10(◎ 8ㄴ과 9ㄱ)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새로운 노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6,13ㄷ-15ㄱ.17-20
형제 여러분, 13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17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8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41.17 참조
◎ 알렐루야.
○ 우리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네. 은총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왔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근원이신 주님, 반석 위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지켜 주시어, 그리스도인들이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저희 민족을 굽어살피시어, 지난 세월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고, 한 민족으로서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주님, 갖가지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을 살펴 주시어, 몸소 위로하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안정과 평온을 찾고 치유의 은총을 얻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교회와 사회의 중심인 가정을 굽어보시어, 가족 모두가 서로 온전히 이해하고 화목하며 생명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이루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1 : 파스카 신비와 하느님 백성>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세례자 요한의 이 외침을 듣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당부합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메시아를 진정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

 

 죄의 원인은 한 마디로 ‘불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시러 오신 것이 ‘평화’입니다.

미국에서는 건전하게 살던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 때 20% 정도가 헤로인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쥐 실험에서도 쥐 한 마리를 가두어두고 일반 물병과 마약이 든 물병을 두면

대부분 쥐는 약물이 들어있는 물병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1970년에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쥐가 과연 마약에 중독된 것인지,

환경 탓인지를 고민하여 새로운 실험을 합니다.

그는 인턴으로 일할 때 만났던 한 환자를 떠올렸습니다. 그 환자는 크리스마스 때

쇼핑몰에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았던 그는 헤로인의 힘을 빌려 무대에서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독은 중독 자체가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쥐들의 천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놀이기구들과 친구들, 짝짓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쥐들은 약물이 든 물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어땠을까요? 미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95%가 자발적으로 헤로인을 끊었습니다.

헤로인으로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제 아주 자명합니다. 천국을 만나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천국을 맛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렵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상처받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 부르며 묵으시는 곳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묵은 다음에는 동료들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TVING에서 방영된 ‘이재, 곧 죽습니다’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는 과정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최이재는 대기업 입사 면접을 보러 갈 때 차에 치여 자살을 한 남자가

죽어가며 자신을 부여잡는 바람에 면접을 망칩니다.

 

7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다시 도전하곤 했지만, 월세도 내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애인 앞에서도 더는 당당할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하고

“죽음은 내 고통을 끝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하며 빌딩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만, 늦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죽음을 한낮 자기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긴 최이재에게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두 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살게 합니다.

다양한 삶을 겪으며 그는 모든 삶은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니 누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참함 속에 가장 비참한 한 가장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열한 번째 몸도 빨리 끝내버리려고 도로로 뛰어듭니다.

 

그때 죽어가며 7년 전의 자기가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손을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저주했던 그 사람이

바로 죽음을 하나의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겼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엄마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엄마가 자기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자기 죽음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깨달으며 죽음 앞에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엄마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주님을 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니 사람을 대하기가 두려웠고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비참함을 깨닫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신학교는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자 신학교는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적으니 그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빼앗는 죄는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치고 싶다면

죽음과 같은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분 앞에서

‘무’(nothing)이 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일

 

저는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5()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삶이 터전이듯이, 천주교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제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보다 세례명이 더 익숙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 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용서가 되었지만 성당에 가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못할 정도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아이는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듯이, 성탄 전야 미사, 부활 성야 미사, 판공, 묵주기도는 굳이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가정은 제 성소의 못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동생은 자연스럽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2013년 교구장님께서 저를 성소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성소국장의 소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식별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학생들의 모임을 예비신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예비 신학생들은 중학생부터 만 29세의 젊은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매월 예비신학생들의 모임이 있었고, 신학생들이 예비신학생들 모임을 주관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 모임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소식지도 발간하였습니다. 성소국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는 성소주일과 서품식입니다. 성소주일은 해마다 부활 제4주에 있었습니다. 서품식은 해마다 2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5번의 성소주일 행사는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장소도 미리 예약을 해서 올림픽 체조경기장과 고척동 돔구장에서 서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4분의 보좌 주교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큰 소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과 분쟁은 먼저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신경을 쓰는 농부이고, 이를 上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이왕 생겼으면 크게 자라기 전에 뽑아 버리는 농부이고, 이를 中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겼는데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추수할 때 뽑는 사람인데 이를 下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떤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상농이겠지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의 농사를 어떻게 져야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밭에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곤 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마음의 밭에 떨어졌으면 곧바로 그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자라서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그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부류의 태도로 신앙의 농사를 져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부류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들도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도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성소(聖召)는 선물(膳物)이자 평생 과제(課題)입니다”-

 

며칠전 노트북 수리후 원장 수사와 나눈 대화입니다.

“모든 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컴퓨터 세계도 끝이없네요.”

“끝까지 알려할 것 없어요. 아는 만큼 살면 되요.”

 

새삼 버려야 할 걱정이요 욕심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톨릭교회도 많이 분열되어 있다 하네요.”

“에페소공의회때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데요!”

심각한 분열이라 하는데 교황님의 일상이나 표정은 한결같고 평화로워보입니다. 분열의 일상화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편안히 사는 모습입니다. 분열중에도 역시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저력입니다.

 

한밤중 일어나 맨먼저 확인해 보는 교황님 동향에 말씀입니다.

교황님께서 젊은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지마라, 위험을 감수하라. ‘위험, 쉬지 않음, 놀람’. 삶은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교황님께서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너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지 나눠라.”

세속의 선교 사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안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89세 노령에도 쉴사이 없이 일하시는 영원한 젊음의 교황님 말씀에서도 활력이 넘칩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마르코 복음과 사무엘 상권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침묵중에 쉴사이 없이 참 부지런히 일하시는구나! 교황님은 이런 주님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심각하지 말고 낙천적이 될 것을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수도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라도 부드럽고 편안해야 한다.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어제 맑시스트회원들에 대한 교황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우리 아르티나사람들은 말합니다. ‘찌푸리지 마라, 뒤로 물러나지 마라.’ 다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저앉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를 멈추지 마라.’”

얼마나 멋진 용기를 주는 말씀들인지요!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 받아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구체적 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유다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와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불림 받았기에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에서 이제 하나하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명의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불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반갑고 기쁜 일인지요! 말그대로 성소의 신비입니다. 어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은 오늘은 레위를 부르시니 참 분주한 일상이십니다.

 

주님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길목에 위치한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던 레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는 선입견도 편견도, 차별도 없습니다. 맨먼저 보시는 마음속 순수한 사랑이요 갈망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 바로 레위의 내적열망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로이, 쓸쓸히 지내던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 제자들의 식탁 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이제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침내 운명이 바뀌어 이제 불림 받은 존재로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레위입니다. 죄인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는 것을 비판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주님은 다음 말씀으로 제압해 버리니 참 통쾌, 유쾌, 상쾌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라 죄인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얼마전 ‘요셉수도원이 아니라 요셉종합병원’이라 하며 속으로 웃은 일이 생각납니다. 저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수도생활입니다. 참으로 병자이자 죄인인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용서와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임금으로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대로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르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부르심의 선택은 그대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소는 평생과정입니다. 한두번 부르심에 응답이 아니라 평생, 살아있는 그날까지 시종여일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죽을 때까지 평생과제가 됩니다. 불림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라가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문턱에서 주님은 우리 마음의 얼굴이 얼마나 당신을 닮았나 검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늘 읽어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14(일) 연중 제2일, 제386(제16)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도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치고 싶다면

죽음과 같은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분 앞에서

‘무’(nothing)이 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전삼용 신부)

 

2.  여러분의 몸은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도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톨릭교회도 많이 분열되어 있다 하네요.”

“에페소공의회때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데요!”

심각한 분열이라 하는데 교황님의 일상이나 표정은 한결같고 평화로워보입니다. 분열의 일상화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편안히 사는 모습입니다. 분열중에도 역시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저력입니다.(이수철 신부)

 

1/14(일) 연중 제2일, 제386(제16)일 기도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내 몸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소서.

 

- 2024년 1월14일(일) 11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