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5일 월요일[(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5일 월요일[(녹) 연중 제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5,16-23
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0(49),8-9.16ㄴㄷ-17.21과 23(◎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히브 4,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실히 설명해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이는 단순한 단식 논쟁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율법보다 앞서시고 당신이 아니면 율법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확실히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율법도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계약에 심취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출구 없음’의 연극 대본을 봅시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 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고통 속에 갇혀 서로 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출구가 없다면 이러한 자기와 타인의 지옥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방에 창문이 있었다면, 그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보였다면 어떨까요? 그곳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희생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으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만 바라본다면 둘은 타버립니다. 부부도 자녀를 키우면서 사랑을 확장해야지 자신들 안에만 갇혀있으면 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창문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죽음과 부활로 사랑으로 인해 도달하게 될 저 세상을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피조물의 본성 상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희망 없이는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는 게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와서야 완성됩니다. 

 

    부부 갈등을 겪다가 공공의 적을 만나 함께 싸우다가 다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는 설정의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부부도 자녀를 낳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려고 하면 결국엔 사랑이 소진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에 그리스도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하면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닫힌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예전에 봉성체를 가면서 근 무력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몸은 불편하였지만, 마음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그 젊은이가 보내 주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제목은 밤하늘이 있기에 별들은 더욱 아름답습니다.’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연을 전하는 밤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이 밤하늘에서 가슴은 떨리게 하고, 얼굴엔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생 중에 교통사고로 를 다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단기기억 상실증이 생겼습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불편할 거라고 했습니다. 신학생에게 그런 몸으로 사제가 되면 많이 불편할 것이라고 했더니 학생은 제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서 2 3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 신학생의 의지가 단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학생은 방에 많은 메모를 적어 놓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사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고, 주교님께서는 사제서품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주교가 되어서 신부님의 본당을 방문했더니 사목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교우들도 신부님이 더 있을 수 있도록 청탁(?)하였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제도 필요하지만 교우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제도 필요합니다.

 

저도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있었습니다. 저는 외적인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장님께 건의해서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했습니다. 사제성소를 위해서 사제라는 다큐를 제작해서 유튜브에 공개했습니다. 100만 명이 넘게 검색한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을 위해서 여름 캠프도 준비했습니다. 4번의 주교서품식을 준비하였고,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도 일하였습니다. 바쁘게 일은 많이 한 것 같은데 식별을 위해서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거나, 여행을 간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큰 행사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머물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비록 유혹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새 포도주는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명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숫양의 굳기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 포도주는 외적인 업적과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담긴 사랑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24년이라는 새 부대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관념과 습관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들의 선행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이해와 용서를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4. 연중 제2주일.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연중 2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그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말씀의 ‘들음’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8)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응답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데 있음을 노래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 40,8)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지체”(1코린 6,15)로 삼으시고 “성전”(1코린 6,19)으로 삼으시니, 그에 합당하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로 안내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개의 동사, 곧 일곱 가지 행동을 요청합니다. 곧 ‘듣다.’ ‘따라 가다’, ‘함께 가다’, ‘보다’, ‘함께 묵다’, ‘말하다(선포하다)’, ‘그분께 데려가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따라 갔습니다.”(요한 1,37). 여기서 제자가 가는 두 가지를 길을 말해줍니다. 곧 “듣다”와 “따라가다”라는 동사는, 제자 되는 길이 단지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넘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하며,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진정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며, 진정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묶으십니까?”(요한 1,38)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분이 “묶으신 곳”이라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당신 인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 체험을 직접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원하는 그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여기서, 제자들이 가는 길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그분과 “함께 가”는 일, 그분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를 받아 함께 가는 일이요, 그곳을 “보는” 일,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일이요, 그분과 “함께 묵는” 일, 그분을 체험하여 사랑으로 흠뻑 젖는 일입니다.
 
그러니, “와서 보아라.”(요한 1,3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으로 걸어라’, ‘이렇게 걸어라’라는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체험을 통하여 배우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라는 히브리어(탈미딤)와 희랍어(마테테스)의 뜻은 ‘배움에 헌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범을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종이 되어 섬기고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전인격적 유대로 변형을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스승과 사별할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2열왕 2,12)라고 부르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스승과의 인격적 관계는 친아버지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랍비가 다 같이 인질로 잡혀가면, 제자는 랍비의 몸값을 먼저 지불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먼저 스승의 짐을 덜어드린 후 아버지의 짐을 거들어야 한다.”
 
결국,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나 스승에 대한 정보적인 접근이 아니라, 교리적인 진리를 배우고 신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따라 사는, 스승을 닮아가는 진정한 변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과 함께 묶은 그들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요한 1,42 참조). 여기에서 제자들의 두 가지 사명이 드러납니다. 곧 그분을 ‘말하는’ 일,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이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태 28,19) 사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동행을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줍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동행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복된 길을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증언하여 선포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주일

 

“와서 보아라”

-머뭄, 경청, 순종, 성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형제들과 함께 정주한지 어언 42년째이고 여기 요셉수도원에서는 36년째 되는 해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나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과연 스승이자 친구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에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정말 스승이신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자 진리요, 희망이자 기쁨이요, 생명이자 빛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때 무지와 허무의 어둠은 짙어져 병든 삶이 되고, 죄악에서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때로 산책 때는 김민기의 옛 “늙은 군인의 노래”를 일부 바꿔부르기도 하며 주님과의 우정을 새롭게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2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저에겐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은 어머니이자 스승이 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스승이자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을 생각하며 자주 부르는 동요입니다. 요즘은 세상 떠난 육신의 어머니보다 더 친근히 와닿는 영원한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중독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 삶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중독의 폐해가 막심하니 문해력, 사회성이 저하되고 관계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합니다. 지난 월-화요일 한겨레 신문은 2면에 걸쳐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경고기사였습니다. 새삼 살아있는 인간관계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좋은 스승은 친구와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자 친구인 예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우선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와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참나의 실현이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온갖 중독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가 되어 온전한 영적 건강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1.늘 참 좋은 스승이신 주님안에 머무르는 것이 제자의 첫째 자질입니다.

정말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관상 훈련보다 스마트폰 해독에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바 참 스승이신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깊이 참 스승을 찾는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스승이라면 세례자 요한처럼 제자들을 참 스승인 예수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요한은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말에 즉각 반응한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따르는 제자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구도자의 우선적 자질이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인 89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력은 60세 남성 수준이라 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무르고 싶은 제자로서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초대입니다. 와서 나와 함께 머물며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에 배움에 대한 사랑이 제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참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안에 머물며 배울 것은 무궁무진 끝이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가 온통 배움의 모범이니까요.

 

저로 말하면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42년째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이었으니 과연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충실한 삶이었는지 성찰과 더불어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간절한 소망은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예닮의 삶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만나 크고 깊게 배운 안드레아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말하면서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두 형제가 한 스승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형제간의 우정도 주님 안에서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2.주님 안에 머무름에 이어 경청과 순종이 제자로서의 두 번째 자질입니다. 

우리는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참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만납니다. 엘리의 사무엘 제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사무엘의 깨어 스승 엘리에게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마다 깨어 경청하다 순종하는 사무엘의 반응이 참 제자답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거라.”

세 번 반복된 후, 엘리의 가르침에 따른 사무엘의 순종적 반응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아, 정말 이런 경청과 순종의 자세로 살아야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니 그의 철저한 깨어 있는 삶이, 경청과 순종의 삶이 참 놀랍습니다.

 

3.성령의 성전인 자기의 몸을 잘 돌보는 것이 제자의 세 번째 자질입니다.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는 탐식의 식욕이요, 탐욕의 물욕이요, 불륜의 성욕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식욕이, 물욕이, 성욕이 사람을 추하게 하고 성령의 성전인 몸을 더럽힙니다. 특히 경계할바 음욕의 불륜이요 성적 타락입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몸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받았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탐식, 탐욕, 불륜의 성욕으로부터 깨끗이 함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때 명실공히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삶을 원하십니까?

 

1.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관상적 삶에 충실하십시오.

2.늘 깨어 주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순종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3.늘 성령의 성전인 몸을 깨끗이 돌보십시오. 결코 탐식, 탐욕, 불륜으로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1/15(월)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사랑에 그리스도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하면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닫힌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문입니다.(전삼용 신부)

 

2. 하느님께서는 2024년이라는 새 부대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관념과 습관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들의 선행을 담아내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이해와 용서를 담아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1.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관상적 삶에 충실하십시오.

2.늘 깨어 주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순종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3.늘 성령의 성전인 몸을 깨끗이 돌보십시오. 결코 탐식, 탐욕, 불륜으로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이수철 신부) 

 

1/15(월)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387(제17)일 기도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낡은 관념과 습관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담아내게 하소서.

이웃을 위한 우리들의 선행을 담아내게 하소서.

미움과 분노는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이해와 용서를 담아내게 하소서.

 

- 2023년 1월15일(월) 11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