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2월 1일 목요일[(녹) 연중 제4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1-4.10-12
1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2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3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4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 주님, 저희 조상 이스라엘의 하느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
○ 주님, 위대함과 권능과 영화가, 영예와 위엄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
○ 주님,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으뜸, 그 위에 드높이 계시나이다. 부귀와 영광이 당신에게서 나오나이다. ◎
○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권능과 권세가 당신께 있으니, 당신 손을 통하여 모든 이가 힘과 영예를 얻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4주간 목요일
2월의 첫날입니다. 어제 서울대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이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짧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모건 프리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3개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걱정하는 감옥, 지난 과거에 집착하는 감옥, 변화를 두려워하는 감옥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바꾸십시오. 당신의 삶을 바꾸십시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5년 동안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팬데믹 어려움 중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신문을 만들어 준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낯선 뉴욕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동료 사제들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가는 길에 기꺼이 동행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합니다. 매주 미사에 함께 해 준 브루클린 한인 성당 공동체에게 감사합니다.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5년 동안 무탈하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이동하면 14번째 인사이동입니다. 8년은 보좌신부로, 8년은 본당신부로, 8년은 교구청에, 8년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이제 해외에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걱정이라는 감옥에, 과거라는 감옥에,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새로운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다행히 전임 신부님들은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창신부님들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느니, 저는 영적인 거름을 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꽃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는 제게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6,7-13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부끄럽게도 언제부턴가 소임 이동 때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수도자 시절,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정말이지
이삿짐이 딸랑 가방 두개였습니다.
소임 이동하는 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정들었던 공동체를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의
그 홀가분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아놓으면 한 짐입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 해도, 가방이 대여섯 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량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던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잡 생각하지 않고, 딴 데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은 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 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 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 나도 마트나 시장 한 번 안 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 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 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가지지 말라'>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습니다.(6,13)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로 ‘증거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임과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그들이 파견 받고 가서 한 일입니다.
곧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날로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닌, 날로 익어가는 발효인생을 삽시다-
“끈임없는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삶”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성인들 삶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와 교회에는 참 무수한 성인들이 나오고 이들의 삶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성서책 같습니다. 이래서 제가 몇해전부터 심취해 읽는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으로 성서를 렉시오 디비나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읽습니다.
누구나의 참 소중한 성경책같은 인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 하나하나가 소중한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하루하루 써내려 가는 아직 미완의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내 나이 곱하기 365하면 각자 고유한 삶의 성경책 쪽수가 나옵니다. 삶이 혼돈스럽고 앞이,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하면서 삶을 새로이 추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로서 1월은 끝나고 내일부터는 2월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써내려 가야할 하느님 선물의 날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성경책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구원의 표지,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을 통해 내 소중한 삶의 성경책을 부단히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똑같은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몰(生沒)연대도 다 다릅니다. 성인들 모두가 가르쳐주는 바 하느님 중심의 내 고유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모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성인들의 삶을 통해 늘 우선적으로 확인하는 사실이 생몰연대에 산 햇수요 여기에 견줘보는 제 나이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날 인생임을 확인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19세기 근대에 속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73세에 선종했으니 저는 성인보다 3세를 더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산날보다 살날이 얼마 안남았음을 봅니다. 성 요한 보스코의 참 아름다운 성경책 같은 삶이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성인들의 배경에는 거의 틀림없이 성녀같은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입니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16일 이탈리아 카스텔누오보 베키에서 출생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두 형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 어머니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분이었고 요한이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그녀는 기도를 생활화하였으며 힘든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자기집을 찾는 불우한 이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아홉 살 때의 꿈을 계기로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26세 되던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성인을 돕던 젊은이들과 함께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와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집니다.
19세기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였고 동시에 2천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였습니다.또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심은 대 영성가로 살레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을 참으로 존경했기에 수도회 명칭도 “살레시오회”입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이때 성인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성인이 남긴 어록 둘이 대표적입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34년 부활절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성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던 1988년 1월31일 교황 성 바오로 2세는 재차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의 지칠줄 모르는 활동의 원천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와 자신의 사업전체의 영감이자 후원자로 여겼던 도움이신 마리아 성모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였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고유의 성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우리는 성 요한 보스코를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으로부터도 참 많이 배웁니다. 내일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상권 시작으로 다윗의 죽음이 소개되고 오늘로서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생애도 끝납니다. 그런데 말년에 다윗은 또 죄를 짓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리고 죄과를 기꺼이 받습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잠시 유혹되어 무지와 불신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만을 후회하여 즉시 뉘우치는 회개에 있습니다. 완전히 회개가 일상화된 회개의 여정에 충실했던 다윗이요, 마지막으로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기도하는 다윗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감동을 줍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치십시오.”
말그대로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요 겸손한 성인 다윗입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비교하며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라는 교황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회개한 성인이 다윗이요 부패로 성인이 못된 솔로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썩어 악취를 발하는 부패인생을 막아주고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패인생이냐 발효인생이냐 수시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 발효인생의 모범이라면 솔로몬은 시작은 좋았지만 회개의 소홀로 부패인생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회개의 일상화와 더불어 참 좋은 영적 효소가 되어 발효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하루하루 내 고유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도와 줍니다.
오늘 다윗의 불신과 교만이 문제였다면 복음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과 불신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던 이들이 급변하여 편견과 질투, 불신에 사로잡히니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 존경받지 못한다.”
무지와 질투, 불신으로 인한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얼마나 고질적 영혼의 질병인지 우리가 체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놀랐고 별 기적도 행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진정 회개가 필요한 고향사람들입니다. 무지와 편견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의 은총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중한 고유의 성경책을 써내려가고 렉시오디비나 하는데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 다니며 가르치셨다.”라는 대목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실망감을 즉시 떨쳐 버리고 본래의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한, 주님의 한결같은 초연한 모습이 큰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이요 동시에 끊임없는 배움의 여정입니다. 이런 인생 여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내 삶의 성경책이요, 날로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이 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익어가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2/1(목)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앞으로 제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걱정이라는 감옥에, 과거라는 감옥에,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새로운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삶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이요 동시에 끊임없는 배움의 여정입니다. 이런 인생 여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내 삶의 성경책이요, 날로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이 됩니다.(이수철 신부)
2/1(목) 연중 제4주간 목요일, 404(제34) 기도일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024년 2월1일(목) 6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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