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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31일 수요일[(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31일 수요일[(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요한 보스코 성인은 1815년 토리노교구의 카스텔 누오보 근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에게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하였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1859년 살레시오회를 세웠으며,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934년에 시성되었다.

입당송

시편 132(131),9 참조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본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똑같은 사랑의 불로 타올라
오직 주님을 섬기며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2.9-17
그 무렵 다윗 2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9 요압이 조사한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
유다에서 오십만 명이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이튿날 아침 다윗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에게 내렸다.
12 “다윗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서 일러라.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을 터이니, 그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13 가드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알렸다.
“임금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을 뒤쫓는 적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 다니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 나라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 좋습니까?
저를 보내신 분께 무엇이라고 회답해야 할지
지금 잘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가드에게 말하였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17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2(31),1-2.5.6.7(◎ 5ㄹ 참조)
◎ 주님,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소서.
○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
○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
○ 당신께 충실한 모든 이들이 곤궁할 때 기도드리나이다. 큰물이 닥친다 하여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리이다. ◎
○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4,4-9)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로 복된 요한을 영광스럽게 하셨으니
그를 기억하여 주님의 제대에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에게 용서와 평화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4,46-47 참조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요한을 기리며 받아 모신 천상 음식으로 저희가 힘을 얻어
믿음을 온전히 간직하며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걷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요한 보스코 사제. ​

오늘의 묵상

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복음마르 6,1-6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오늘은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 특히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착한 목자였던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의 축일입니다.

줄여서 돈보스코라고도 부릅니다.

 

돈보스코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모토요, 그가 생애 내내 일관되게 지니고 살았던 화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 가라!”

 

그가 살아생전 직접 창립한 세 단체의 명칭을 통해 돈보스코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있습니다.

 

① 남자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을 위해 창립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그는 여타 수도회와는 달리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에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각별히 존경했을뿐 아니라 청소년 사목자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노력했던 롤모델이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수도회 명으로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교회 안에서 매력 넘치는 성인, 온유와 친절의 대명사로 유명합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교육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물이나 권력, 힘이나 조직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평생토록 강조했습니다.

체벌이나 폭력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내와 사랑, 온유와 친절만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랑의 교육학, 예방 교육을 창시한 것입니다.

 

②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줄여서 살레시오 수녀회라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함께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살아 생전 자신이 수행하고 이룩한 위대한 교육 사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극찬하고

박수를 보낼 때 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의 인생 여정과 교육 사업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강하면서도 균형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면서 지은

수녀회의 이름입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감사의 기념비라는 뜻으로 수녀회의 이름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회로 지었습니다.

 

③ 살레시오 협력자회: 돈보스코는 자신이 개척한 선구자적인 교육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

수도자들만으로는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예방 교육이라는 자신의 교육 이념에 뜻을 같이 하는 평신도들과의 협력을 위해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립했습니다.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세상 속의 살레시오 회원들, 수도원 담밖의 살레시안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돈보스코의 정신과 영성, 그의 마음과 그가 지녔던 사랑으로

세상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살레시오 회원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 진출 안 한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지역, 분쟁 지역, 청소년들이 심각한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에서

돈보스코께서 하셨던 바로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확할 것을 많은 데 일꾼이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돈보스코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청소년 구원 사업에 기쁘게 참여할 일꾼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이름으로 창립된 단체들은 32개 단체가 있으며, 회원 숫자는 40만명에 달합니다.

살레시오회 회원만의(사제 및 수사) 현재 숫자는 1만 4천 명가량이니, 돈보스코 영성의

보편성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돈보스코의 이름과 영성으로 한국에서 활동중인 단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시오 회원이 창립한 수녀회입니다.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는 세상 안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하는 단체입니다.

 

성소 문의

살레시오회: 010-6221-3520, http://www.ibosco.net

살레시오 수녀회: 010-2894-8958, http://salesiansisters.or.kr

살레시오 협력자회: 010-9060-4091, https://asscc.kr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 0507-1306-1505, http://isvdb.creatorlink.net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서울 관구: 010-5830-3217,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 010-8566-1865,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원 관구: 010-7273-5983, http://icaritas.or.kr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뉴욕에서 5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사제들이 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4명의 사제가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귀거래사할 날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는 동화입니다. 어릴 때,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감동을 했고, 늘 이 동화는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늘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야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수행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이 약해지면 당장의 정책 수행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점점 병들게 되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왕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한 일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고,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유대인들의 법을 들어 돌로 쳐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1.30.연중 제4주간 화요일 

                                                                                    2사무18,9-10.14ㄴㄷ.24-25ㄱㄴ.30-19,3 마르5,21-43

 

 

                                                     하느님 중심의 믿음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없다."

 

오늘 1월30일 다산 어록의 말씀입니다.

날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가 진짜 참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실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살고 났는데 노추(老醜)의 욕심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허망할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믿음으로 ‘성화(聖化)의 여정’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노후의 삶일까요.

일출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봄의 꽃향기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가을 단풍의 풋풋한 내음에 초연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마냥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유종의 미란 말도 있듯이 젊음보다 인생 마무리의 노년이 참 중요함을 느낍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정확히 4시간 간격의 소변이요 하루 6차례의 소변을 보게 됩니다.

“아, 몸은 살아 있어 평생 쉬지 않고 일하고 있구나! 태만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은 몸에 죄짓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더불어 생각난 시편 121장 다음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리라.”(시편121,4-8)

 

믿는 대로 됩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믿음을 위해 한곁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이요, 믿음의 전사로사 우리의 신원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하고 가열찬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탈리아 언론인들을 향한 소통을 위한 세 요소에 공감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의 믿음을 북돕웁니다.

 

첫째 말마디는 “가까움(proxmity)”이다. 

이민자들,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버려진 이들을 결코 잊지 말고 가까이 하라.

하느님의 세스타일은 ‘가까움(proxmity)’, ‘부드러움(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다.

그분은 늘 용서하신다. 

 

둘째 말마디는 “마음(heart)”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며 가깝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용기(courage)’도 라틴어 ‘마음(cor)’ 어원에서 기인한다.

‘마음과 함께 시류에 거슬러 가라(go against the flow with the heart)’. 

 

셋째 말마디는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모두가 그 맡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선에 깨어있는 책임감이다.

언론인들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위대함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사막교부의 일화입니다.

한 제자가 포멘 압바를 찾아 한 말씀 주십사 청하자, “교부들은 매 행위마다 참회로 시작했다.”

그 제자가 다른 말씀을 주십사 청하자, “네가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풀수 있도록 노동을 하라.

자선과 믿음이 죄로부터 깨끗이 해준다.”

 

제자가 또 묻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부는 “믿음은 겸허하게 사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대답합니다.

새삼 참 믿음의 본질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산(山)과 강(江)이라는 제 자작시도 한결같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모두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예화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지 않았더라면 회당장은 주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자신의 믿음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니 딸의 죽음이 전화위복,

야이로의 믿음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됨을 배웁니다.

 

야이로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이 감동적이요 이런 사람이 진짜 참사람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구원의 삼박자인 1.주님의 연민의 사랑, 2.따뜻한 스킨쉽,

3.권능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아람어 “탈리타 쿰!” 외치면서 즉시 일어나 다시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그 여자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으니

역설적으로 하혈병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음을 봅니다.

역시 하혈병을 앓던 부인은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의 결과 치유를 받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자, 부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아뢰자

주님의 자비로운 응답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거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치유 말씀처럼 들립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의 치유의 구원에 반드시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 가까움, 부드러움, 연민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 역시 하느님의 이런 친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세 스타일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다윗의 파란만장한 믿음의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대죄는 용서받았지만 믿음의 여정을 통해 보속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 엄혹합니다.

이 모든 비극과 불행을 겸손과 비움의 믿음의 계기로 삼는 다윗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가 참 경이롭습니다.

 

앞서는 절친인 요나단의 전사에 통곡하던 다윗이, 어제는 자기를 쫓던 아들 압살롬을 피해

올리브 고개길을 울며 오르던 다윗이 오늘은 압살롬의 죽음에 성문 누각에 올라 대성통곡합니다.

간장을 끊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런 비극의 와중에도 다윗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은 그 백절불굴의 믿음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았기에 다윗의 믿음의 여정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버텨내고 견뎌낸 다윗의 초인적 믿음의 여정이 영원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스승들이 예수님과 야이로 회당장.

열두 해 하혈병 앓다가 치유된 부인, 그리고 사무엘 하권의 다윗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이고 이 밖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믿음의 스승들을 무수히 만납니다.

 

특히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다윗의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서 치열하고 가열한 삶은

이분들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여정에 믿음의 전사로서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우리를 도와 줍니다.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31(수)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돈보스코는 살아 생전 자신이 수행하고 이룩한 위대한 교육 사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극찬하고

박수를 보낼 때 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의 인생 여정과 교육 사업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강하면서도 균형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습니다.(양승국 신부)

 

2.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회당장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구원의 삼박자인 1.주님의 연민의 사랑, 2.따뜻한 스킨쉽,

3.권능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아람어 “탈리타 쿰!” 외치면서 즉시 일어나 다시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수철 신부)

 

1/31(수)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403(제33)일 기도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합니다.

 

- 2024년 1월31일(수) 10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