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30일 화요일[(녹) 연중 제4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30일 화요일[(녹) 연중 제4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18,9-10.14ㄴㄷ.24-25ㄱㄴ.30―19,3
그 무렵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때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가 큰 향엽나무의 얽힌 가지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향엽나무에 휘감기면서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게 되고,
타고 가던 노새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10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요압에게 알려 주었다.
“압살롬이 향엽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요압은 표창 셋을 손에 집어 들고, 압살롬의 심장에 꽂았다.
24 그때 다윗은 두 성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
파수꾼이 성벽을 거쳐 성문 위 망대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혼자서 달려오고 있었다.
25 파수꾼이 소리쳐 이를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그가 혼자라면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다.” 하고 말하였다.
달려온 그에게 30 임금이 “물러나 거기 서 있어라.” 하니, 그가 물러나 섰다.
31 그때 에티오피아 사람이 들어와 말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 주셨습니다.”
32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그 어린 압살롬은 무사하냐?” 하고 묻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의 원수들과 임금님을 해치려고 일어난 자들은
모두 그 젊은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19,1 이 말에 임금은 부르르 떨며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다.
2 “임금님께서 우시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신다.”는 말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3 그리하여 모든 군사에게 그날의 승리는 슬픔으로 변하였다.
그날 임금이 아들을 두고 마음 아파 한다는 소식을
군사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6(85),1-2.3-4.5-6(◎ 1ㄱ)
◎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가련하고 불쌍한 이 몸이옵니다. 제 영혼 지켜 주소서. 당신께 충실한 이 몸,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
○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 주님, 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복음 환호송

마태 8,17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 알렐루야.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며칠 전 뉴욕에서 노량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에 대한 영화가 막을 내렸습니다. ‘명량, 한산, 노량입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승선한 장군선이 물살에 떠밀려 큰 바위에 부딪쳐 부서질 위험에 처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장군선에 고리를 달아 물살이 약한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장군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도 장군을 사랑하는 모습에 뭉클했습니다. 한산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학익진입니다.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진법을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듯이,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으로 일본의 배를 포위하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노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북소리였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순신 장군은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쳤습니다. 장군선에 울리는 북소리는 명나라의 군인과 조선의 군인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북을 치는 과정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계속 북을 치게 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렇게 7년 전쟁을 끝이 났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하는 모습이 3번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은 귀가 열려서 들을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 7, 37)”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에파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게파이다. 게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이 교회를 무너트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 시간이 흘렀어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굳건하게 바위 위에서 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베드로 사도를 초대교황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탈리타쿰(일어나라)’ 죽었던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마르 5, 42)”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2024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탈리타쿰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탈리타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4주간 화요일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었으니,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고생도 하였을 것이고, 가진 재산도 치료비로 모두 탕진하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마르 5,27)

사실 율법규정에 따르면, 그녀는 피 흘리는 부정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만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지게 되면 그 사람마저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감히 이러한 금기를 깨어버릴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곧 ‘군중에 섞여들’만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만큼 믿음이 굳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불결한 것이 닿으면 같이 불결해지게 되는 법인데, 오히려 불결함이 깨끗하게 치유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열하던 여인의 숨은 상처와 고통을 통하여 당신의 치유능력이 선포되었으니, 숨어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은 영광 받으소서. 

눈에 보이는 한 여인을 통하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신성이 드러났고, 하혈하던 여인의 치유로써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선포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여인도 영예로워졌습니다.

여인은 신성의 증인이었고, 주님은 여인이 지닌 믿음의 증인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단지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옷’에 믿음의 손을 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위와 권능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말씀이신 분’이 ‘말씀이란 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말씀’에 손을 대어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만질 때, 우리 안에 그분의 힘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옷을 통하여 흘러나왔듯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곧 ‘말씀’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갈라 3,27 참조)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우리의 옷에 손을 대는 이들이게 말씀의 권능을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 ‘말씀의 전류’가 흘러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사랑의 전등을 밝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3. 송영진 모세 신부 강론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귀들과 돼지 떼』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1-13).”

 

1월 29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인데, 마귀를 쫓아내신 일 자체는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일이고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야기 중간에 들어 있는 돼지들 이야기는 많이 이상합니다.

여기서 ‘돼지들’은 그 지역이 이방인들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고, 유대교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마귀들이 예수님께

청한 것은, “인간들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한 것입니다.

마귀들이 돼지들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귀들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니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곳에 돼지들이 아니라 다른 가축들이 있었다면,

마귀들은 그 가축들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신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서 돼지들을 죽이신 것은 아닙니다.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은 일은, 말하자면 집단 자살을 한 것인데,

그것은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혐오하고, 그래서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돼지들 속에 들어간 마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돼지들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어떻든 결과는 ‘선’입니다.

그래서 돼지들은 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선의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7).”

 

게라사인들의 ‘반응’도 많이 이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역에서 마귀들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기만 하고, 또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낸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복음서 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1) 게라사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까 그들은 예수님도 싫어했을 것입니다.

2) 그들에게도 분명히 마귀는 두려운 존재였겠지만,

그 마귀들을 쫓아낸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으니 그럭저럭 마귀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생긴 변화가 낯설었을 것이고,

그 변화가 유대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4)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생긴

경제적인 손해가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돼지 떼의 주인들은 예수님께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욕하면서 쫓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5) 그들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사람들, 그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았을 것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게라사인들과 많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만, 또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게라사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 데에

크게 불편한 것도 없으니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사는 모습,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면, 먼 나라의 일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습,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관한 복음을 들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 라고만 생각하면서 비웃는 모습 등.

그렇게 무심하게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귀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사람들 속에 숨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1.29.연중 제4주간 월요일                                     2사무15,13-14.30;16,5-13ㄱ 마르5,1-20

                                                  

지상 천국의 온전한 삶

                                   -하느님 중심의 정주(定住)와 믿음과 사랑-

 

"새벽부터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90,14)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이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어록에 나오는 오늘 1월29일자 말씀입니다.

이래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한쪽문이 닫혔다고 절망할 것은 아니니 한쪽문이 닫혔으면 옆문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이니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어제 1.28일 주일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축일이자 동방교회에서는 사막의 은수자,

성 이삭의 축일을 지냅니다.

7세기 시리아 출신의 성인으로 서방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성인입니다.

 

어제 “지옥은 텅 비어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이 성인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란

인터뷰 기사를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지옥이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씀이 회자된 적이 있고

나는 이것이 성 이삭이 다뤘던 주제라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렇다. 성 이삭은 지옥이 텅 비워져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했다.

초기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갖은 많은 교부들이 있었고 이것은 성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되는(All will be all in God)’ 종말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지옥이 영원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성 이삭은 영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특별히 흥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무한함(The immensity of divine love)’이 그의 관심사였다.

성인은 신적 사랑은 하나의 목적을 지녔으며, 창조의 목적은 분명히 인간 악에 의해 좌초되지 않는 다는 것과

신적 사랑은 마침내 어떻든 지옥을 극복할 것을 믿었다.

성 이삭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것은 니싸의 그레고리오, 서방의 노르비치의 줄리안,

많은 신비가들의 생각이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삼 “하느님은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찌보면 지옥도 하느님의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다는 것이고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잃을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연옥이자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치유받은 게라사의 미친 사람과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의 대조에서

우리는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그대로 지옥의 사람같습니다.

 

흡사 주님이 지옥에서 그를 구출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아.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바로 하느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고 공동체 에서 격리 소외되어 고립단절의 삶을 살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지옥에서의 미친 사람입니다.

고립단절의 무관(無關)한 삶이 바로 지옥입니다.

복음 서두의 장면은 그대로 지옥도(地獄圖)를 연상케 합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흡사 지옥에서 구원의 하느님을 찾아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미친이를 지옥에서 끌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더러운 영을 제압할 수 있는 분은, 더러운 영에 들린 이를 지옥에서 끌어낼 수 있는 분은

구원자 예수님뿐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시 교황님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누누이 강조하는 말씀이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Don’t dialogue with the devil)”는 것입니다.

악마와 대화하다보면 십중팔구 말려들기 마련이니 창세기의 하와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악마의 아부성 발언을 일언직하에 물리치시며 부마자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하는 예수님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일련의 과정을 겪은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마귀들렸던 자의 청을 거절하시고

자기 공동체 삶의 자리로 복귀하여 복음 선포자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부마자(付魔者)에서 복음 선포자(宣布者)로 획기적 구원의 전환에 모두가 놀랐다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마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평소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새삼 지옥도 천국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사무엘하권의 다윗의 대죄의 보속으로 겪는 고난과 시련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정말 미치거나 자살까지 이를 극한 상황에서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다윗의 모습이

복음의 미친자와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으며 올리브 고개를 울며 올라가는’ 피난길에 오른 장면은

그대로 비극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 지옥과도 같은 극한 상황의 수모와 곤욕과 시련 모두를 남김없이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은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이 정말 놀라운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시종일관 이런 다윗을 눈여겨 보시며 함께 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시편 139장 말씀입니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7-8)

 

천국도 지옥도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천국도 지옥도 스스로 자초하는 선택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지만 관계가 나쁘면 지옥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살 때 천국이요 하느님을 등지고 살 때 지옥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지상천국의 온전한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와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제 좌우명 고백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아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


1/30(화)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너는 게파이다. 게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2.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게라사인들과 많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만, 또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게라사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송영진 신부)

 

4. 교황님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누누이 강조하는 말씀이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Don’t dialogue with the devil)”는 것입니다.

악마와 대화하다보면 십중팔구 말려들기 마련이니 창세기의 하와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악마의 아부성 발언을 일언직하에 물리치시며 부마자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하는 예수님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이수철 신부)

 

1/30(화)  연중 제4주간 화요일, 제402(제32)일 기도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너는 게파이다. 게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탈리타쿰!

일어서서 걸어다니게 하소서.

 

- 2024년 1월30일(화) 5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