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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8일 금요일[(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8일 금요일[(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86(85),8.10
주님, 신들 가운데 당신 같은 이 없나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1(80),6ㄷ-8ㄱ.8ㄴㄷ-9.10-11ㄱㄴ.14와 17(◎ 11ㄱ과 9ㄴ 참조)
◎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 전에는 모르던 말씀을 나는 들었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풀어 주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내려 주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나는 너를 구하였다.” ◎
○ 천둥 치는 구름 속에서 너에게 대답하였으며, 므리바의 샘에서 너를 시험하였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른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들어라. ◎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17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감사드리며 바치는 이 예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에게 언제나 구원의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르 12,33 참조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희생 제물보다 낫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오늘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가 충만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이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언제나 주님의 자애에 의지하며
어디서나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예전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수첩이었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은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수첩을 꺼내서 연락처를 찾았습니다. 그 수첩에는 주인공 최민식을 위험에서 꺼내 줄 동아줄이 있었습니다. 최민식은 집안의 어르신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는 검사에게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수첩은 아니지만 제게도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에는 그동안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연락처가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께 스마트폰에 있는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신문홍보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휴스턴 본당에서 잠시 머물 때입니다. 본당 봉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몇 마디 대화를 하니 함께 아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 자매님은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유치원생이었다고 하는데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혼배 주례 사제가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이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동창신부님의 동생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저와 같은 고향이었고, 제 사촌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5명만 거치면 지구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LA에 가면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에 후원을 해 주고, 아침이면 같이 미사를 하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 서부지국의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토론토에 가면 공항까지 나와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이 있습니다. 버지니아에 가면 가족처럼 살갑게 대해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형제님은 박학다식하여서 버지니아에 있는 성당들의 순례를 도와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늘 맑은 목소리로 보스턴의 명소를 알려주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자매님의 안내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갔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머물렀던 월든 호수에도 갔었습니다. 5년간 머물렀던 뉴욕에는 제게 힘을 주고, 저를 도와주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지냈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3 6개월 동안 미사를 하였던 브루클린 공동체가 있습니다. 특수사목을 하다가 12년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을 하는데 많은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남의 재물이나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죽음의 골짜기를 갈지라도 안전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늘 싱싱하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죄인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잡으려는 동아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동아줄은 튼튼해 보여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동아줄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28-34

 

그분을 만난 이후, 그리도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것, 보다 진정성을 지니기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진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의 진지한 자기 반성도 필요하겠습니다.

우리가 동반해드리는 교우들은 절절하고 뜨거운 하느님 사랑 체험에 저리도 행복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냉랭하고 뜨뜨미지근할 뿐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은 하느님 사랑 체험의 첫출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당시 받은 느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는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 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카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7.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 루카11,14-23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

                                                      “늘 예수님편에 서자”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자 사순시기 내내 계속되는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입니다.

사순시기 낮기도 독서시 계응송 역시 늘 동일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주소서.”(시편51,12)

 

어제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도 멋졌습니다.

“겸손으로 교만과 싸우자(Combat pride with humilty)”는 일곱 번째 강론으로

이제 다음번 허영 하나만 남았습니다.

 

겸손한 마음 역시 어진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중 ‘배우다’, ‘섬기다’에 이어 ‘어질다’입니다.

공자의 인(仁)이 바로 어질 인(仁)자입니다.

 

마음이 어질다는 마음이 “좋다, 착하다, 순하다, 슬기롭다, 너그럽다, 관대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덕목을 다 담고 있는 “어질다”라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어진 사람에 대한 언급같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새삼 남에게 귀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들음의 수용적 사람들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공자가 강조한 것 역시 호학(好學)과 더불어 인(仁)입니다.

결국 공부의 목적도 어진 사람이 되는데 있음을 봅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결코 잊지 못할 고마운 마음 가득 들었던 어느 분과의 아름다운 대화 내용과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남도(南道) 섬진강 부근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랍니다.

 

-“섬진강 매화마을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납니다. 봄철이 유난히 아름다운 섬진강의 그 자체가 시이지요!”

사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말도 있듯이 봄철의 한반도는 어디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풍경입니다.

“내년 봄에는 신부님 모시고 매화 가득한 아름다운 섬진강에 봄여행하고 싶습니다.

봄의 섬진강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고받은 대화에 즉시 떠오른 “산(山)과 강(江)”이라는 자작시에 만족했고 위로 받았습니다.

이 또한 어진 마음의 표현이겠고 참으로 정주 영성의 절정이 아니겠나하는 자긍심(自矜心)도 들었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山)이요 움직일 때는 강(江)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끊임없이 임향해 흐르는 강인데

 늘 임을 만나 임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인데

 어찌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런지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처럼, 산과 강의 정주영성을 살아가는

참으로 깊고 어진 사람들이 이상적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와 루카복음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니 떠오른 예화와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흡사 무지의 악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중심인, 참으로 어지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무지의 악마입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탄이, 악마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님을 떠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다음 실감나는 예레미야서의 묘사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변함없이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 등 부정적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요.

사람이라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이런 이들이 악마요 사탄입니다.

악에 사로잡힌, 악에 포획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구제불능의 마음이 딱딱하고 목이 뻣뻣한 무지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요 죽어있는 죽음의 특징은 차거움과 딱딱함입니다.

흙도 마음처럼 살아있는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곡해하는,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영리한 마귀들이 결코 분열되는 일은 없으니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어불성설임을 천명하시며 당신의 구마행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기인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악마를 포박할 수 있는 가장 힘센자로 당신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서(이사49.24-25)에서 예고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만이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7,24-25)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늘 당신 편에 설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며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3/8(금) 사순제3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죄인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잡으려는 동아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동아줄은 튼튼해 보여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동아줄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런지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이수철 신부)

 

3/8(금) 사순제3주간 금요일, 440(제70)일 기도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3월8일(금) 4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