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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9일 토요일[(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9일 토요일[(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3(102),2-3 참조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본기도

주님,
해마다 사순 시기의 재계로 파스카 성사를 준비하게 하시니
저희가 그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3-4.18-19.20-21ㄱ(◎ 호세 6,6 참조)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 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성사에 참여하며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8,13 참조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천상 은총으로 채워 주시어
굳건한 믿음으로 성실히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오른팔을 펼치시어
믿는 이들에게 하늘의 도움을 내려 주시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아
합당하게 청한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댈러스 성당으로 왔을 때 뉴욕에서 신부님들이 같이 왔습니다. 먼 여정 동행해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들은 사제관의 시설들도 점검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사제관의 컴퓨터를 치우고, 저의 노트북으로 다시 설치해 주었습니다. 엉클어져 있던 선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속도가 느려서 불편했던 인터넷을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 해 주었습니다. 회사에 전화를 하니 새로운 장치를 배달해 주었습니다. 저는 냄새에 둔감한데 신부님 한분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점검해 보라고 했습니다. 점검하니 가스가 조금 새고 있었습니다. 다행이 고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나올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습니다. 청결을 위해서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설치하였습니다. 열쇠로 열던 문도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번호 키는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댈러스에 온지 3일 만에 제가 바라는 것들이 해결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들이 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결혼한 부부가 잘 지낼 수 있는 5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다투고 싸운 날일지라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면 좋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자는 말이 있듯이 논쟁과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풀고 잠자리에 들면 좋다고 합니다. 기념일을 잘 챙겨 주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한다면 배우자는 감동할 것입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면서 함께 피정을 가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선물은 오늘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보내는 기분 좋은 말도 선물이 됩니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등산을 하는 것도, 골프를 치는 것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부부가 함께 하면 더 많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부부라고 할지라도 서로가 바쁘게 지내다보면 무심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물러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도 좋지만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대화는 부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랜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노부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닭의 날개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헤어지는 마당에도 내가 실어하는 닭 날개를 주네요.” 사실 할머니는 닭의 가슴살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날개를 먹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날개를 좋아하지만 할머니가 날개를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가슴살을 먹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단식하였고, 봉사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8,9-14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내면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속시원한 사이다 같은 거침없는 언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세리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에 많는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는 예수님의 모습에 전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에 거슬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서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 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8.사순 제3주간 금요일                                                    호세14,2-10 마르12,28ㄱㄷ-34

                                                            회개의 여정

                                                    -회개와 사랑, 새로운 삶-

 

오늘의 다산 어른의 말씀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사랑 하나로 요약됩니다.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사랑으로 정리된다.

내 마음의 바름을 다른 이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다산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가 사랑입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이요 삶의 의미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삶은 ‘사랑의 학교’로 정의하곤 합니다.

 

“공자가 ‘삼아! 내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스승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논어

공자 역시 충서의 사랑, 용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용서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새로 구입한 소설의 문장 표현들이 너무 아름다워 처음 두페이지를 소리내어 읽어봤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아름다움이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합니다.

 

어제 강론중 인용된 “산과 강”이란 제 자작시에 감동하여 보내준 댓글도 잊지 못합니다.

 

“내가 머물면 산이고 움직이면 강이다. 와! 신부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최고세요.”

 

한 자매는 ‘산과 강’을 시화(詩畫)로 만들어 보내줬고 덕담의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 시화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네요! 축하드립니다.”

 

이 또한 사랑의 덕담입니다.

의도적, 의식적으로 누구든 저는 이름 앞에 과감하게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를 꼭 붙입니다.

고백하라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백하다 보면 사랑이 뒤따라 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고백하며 막 살 수는 없으니 나를 위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전례가 좋은 것은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집 피정집 벽에 붙어있는 제 자작시 “사랑”이란 시화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27년전 시이지만 당신으로 지칭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늘 새롭게 타오르고 있음을 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 사랑의 순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강조되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주님은 이웃 사랑까지 덧붙여 답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갈림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사랑이되 우선순위는 하느님 사랑에 이은 이웃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공감, 감동한 율법학자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화답합니다.

 

호세아서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신의의 사랑, 예지의 사랑입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례의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삶이 바탕된 참된 전례에 대한 강조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가 아닌 삶과 전례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는 공허(空虛)하고 전례가 없는 삶은 맹목(盲目)일 수 있습니다.

 

전례와 삶은 둘이자 하나요 함께 가야함을 봅니다. 미사전례는 삶으로 확산(擴散)되고

하루의 삶은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흡족해 하시며 그를 격려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율법학자는 지금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궁금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화신이자 그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며 평생 예수님께 보고 배워 살아야 할 사랑의

이중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뢰개와, 사랑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끝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영혼의 화장에 사랑의 기도와 회개보다 더 좋은 화장품도 없습니다.

사랑의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아름답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는 영혼입니다.

호세아가 우리 모두에게 거듭 요청하는 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쉬듯, 밥먹듯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집중적 회개의 시기, 정화와 성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는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축복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사랑에, 삶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의 사랑의 시가 호세아서의 대미를

참 멋지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주님의 미사축복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회개에 따른 하느님 사랑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14,6-8). 아멘.


3/9(토) 사순제3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조재형 신부)

 

2.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양승국 신부)

 

3. 첫째,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세째,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설교하려 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신의의 사랑, 예지의 사랑입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례의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삶이 바탕된 참된 전례에 대한 강조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가 아닌 삶과 전례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쉬듯, 밥먹듯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집중적 회개의 시기, 정화와 성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는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축복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사랑에, 삶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수철 신부)

 

3/9(토) 사순제3주간 토요일, 441(제71)일 기도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세째,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아버지 하느님!

나를 맡기오니 인도하소서.

 

- 2024년 3월9일(토) 5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