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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감사일기

[매묵]2024년 4월 10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0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8(17),50; 22(21),23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 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6.1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의 구조를 바꾸자고 말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유와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과 부패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류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고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달콤한 열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열매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같은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 지고 있습니다. 철학, 문학, 예술, 인문학, 종교라는 인류의 유산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갈매기의 꿈’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갈매기가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갈매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입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사랑하는 갈매기와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갈매기와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매기의 고통, 자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는 갈매기의 고통을 깊이 성찰하는 갈매기입니다. 그런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갈매기입니다. 이 갈매기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공감, 겸손, 회개, 식별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갈매기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소크라테스일 수도 있고, 그 갈매기는 예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매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혁명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처럼 예수님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신들의 명성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온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3,16-21

 

하느님의 품에 쉽게 안기려면

 

형제들과 함께 몇 군데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열심히 씨는 뿌리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삽, 쇠스랑, 곡괭이 등을 동원해서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이랑을 만들고 있는데,

지나가시던 ‘전문 농사꾼’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저희들을 바라보십니다.


인삼밭 주인 아저씨께서는 트랙터로 하면 금방일 텐데,

왜 그렇게 ‘쌩고생들’ 하냐고 야단을 치십니다.

 

아예 저희 밭 옆에 쭈그리고 앉으신 할아버지 한분께서는 도대체 어디서 온 젊은이들이냐며

집요하게 물어보십니다.


뭐라고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기도 뭣하고, 이야기해봐야 이해하지도 못하실 것 같아서

뭐라고 설명해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교도관이고요, 이 양반들은 외근 나온 재소자들입니다.

이 양반들 고생들 좀 해야 되서 일부러 기계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갑자기 표정이 바뀌신 분들께서 그제야 아무 소리 않으시고 당신들 밭으로 가시더군요.

그러면서 당신들끼리 하시는 말씀.


“얼굴들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참으로 순박하신 분들이더군요.

제 말을 정말 믿어버리시더군요.

 

저희들 행색이며, 말투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즉시 답이 나올 텐데,

워낙 착하게 사시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워낙 타고난 ‘뻥쟁이’라서 그런지

제 말을 그대로 믿으시더군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내일 밭에 갈 때는 막걸리라도 몇 병 사들고 가서 사과를 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의 내용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교리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리, 엄청 복잡해보이지만 사실 위 진술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멸망하지 않는 방법, 구원을 얻기 위한 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은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그를(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믿으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없습니다.


복잡한 것 좋아하고, 거창한 것, 그럴 듯한 것 좋아하던 유다인들에게 있어

‘너무 쉽다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

구세주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들 눈앞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도 간절히 염원했던 구원이 바로 코앞인데,

그리도 애타게 기다려왔던 영원한 생명의 문이 바로 눈앞인데,

그리고 구원되기는 너무도 쉬웠는데,

너무 쉽다는 것 때문에 결국 믿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또 다른 형태의 불신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보니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호의를 베풀어도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접근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워낙 자비로우신 분이기에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영생의 대열에 이미 참여했습니다.

다만 우리의 구원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사실을 사심 없이 믿어야하는데, 이걸 죽어도 믿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늘 지지부진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은혜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자비에 대한 인식도 그저 그렇습니다.

비만 증세가 있는 70Kg짜리 아이를 품에 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품에 쉽게 안기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주에 오르려면

역시 가벼워져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영생의 샘물을 마시려면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함이 요청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2주간 수요일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세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17)

이는 흔히 '복음서 속의 복음' 또는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구절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 '하느님의 사랑', 나아가 '먼저 하신 사랑', 곧 '거저 베풀어진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단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되,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토록 차고 넘치는 사랑을 이미 받아먹은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다면, 굳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박이나 번개,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거부하고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존중하고 수락해야 할 선물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니,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모두가 사랑하고 가꾸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런데 혹시 세상을 마치 마귀처럼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미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속 정신입니다.

맘몬을 앞세우고 굴러가는 물신주의나 자신의 이익과 안정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속 정신에 빠져 속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녹이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 곧 ‘먼저 베풀어지고’, ‘거저 베풀어진 사랑’이 복음 정신입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며, '세상'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성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시건만, ‘이미’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까닭입니다(요한 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건만, 막상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고 심판한 까닭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거부는 이미 심판받게 되지만,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요한 3,2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9.화요일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2000-2016) 

노트커 볼프 아빠스(1940.6.21.-2024.4.2.)

사도10,34-36.37ㄱ.42-43 요한5,24-29

                                                           믿음의 여정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63,2)

 

오늘 화답송 시편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공통적 진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4월2일 부활 축제 팔일 화요일에 선종한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 노트커 볼프 아빠스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이야말로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회 역사에 전설과 신화가 된 참 걸출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부활 팔일 축제중, 이탈리아에서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일행과 함께 하던 아빠스님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자 급거 귀국,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룻밤을 묵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득 아시아에서의 베네딕도회 모임차 순례 여정에 올랐던 트라피스트회 수도승 토마스 머튼이

방콕의 자신의 방에서 1968년 12월 10일 선종하신 사건이 연상되었습니다.

이날은 토마스 머튼의 수도원 입회날이기도 합니다.

두분 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니 길이신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분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예수님의 제자답게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다운 삶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순간 아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란 말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었던 노트커 아빠스님의 생애를 일람했을 때 느낌은 정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이요,

매일 하루를 끝낼 때 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고백이 뒤따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노트커 아빠스님은 사부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의 순례 여정중 주님의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선종하신 것입니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에 돌입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아빠스님이요, 아니 이미 살아 생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영생의 삶을 사셨던 아빠스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영적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늘 여기 오늘 지금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요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함을 배웁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에 관해 참 많이 말합니다만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최종 시험에 해당되는 죽음이요 그 시험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짧은 구절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대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한 말마디가, 또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합니다.

 

이런 죽음의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라틴어 경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라”는 말입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은 하루하루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습니다.

1940년에 태어나 2024년 선종시까지 84세까지, 저보다 9세 연상이셨지만 그 삶의 질이나 삶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3년동안 오틸리엔 수도원은 물론 오틸리엔 연합회를 책임진 최고의 장상이었고,

이어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로 4차례 16년 동안 연임하셨으니,

무려 39년 동안 최고 장상이 되어 한결같은 열정을 쏟으신 것입니다.

 

아마 아빠스님처럼 선교 여행을 많이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친화력에 참 자유로운 분이셨고,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안에 정주한 베네딕도회의 전형적인 선교 수도승 아빠스였습니다.

 

아빠스님에 대해 평전이 나온다하면 스토리와 컨텐츠가 참으로 풍성한 대 서사시 같은

한권의 성서같은 평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베드로의 깨달음은 노트커 아빠스님의 깨달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를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수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친교를 나눈 아빠스님이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었고

타고난 선교사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처럼 노트커 아빠스 역시 “보편인(universal man)”이자 “세계적인 수도승(grobal monk)”이었습니다.

 

수도승들에게 은퇴란 없고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역으로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만이 있을뿐이요 선종시까지 이의 모범을 보여준 영원한 현역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장상직을 내려 놓은 후 고향집같은 오틸리엔 수도원에로 돌아가신후에도 눈부신 활약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모든 공직을 내려놓은후 오틸리아 수도원에 귀원후, 흡사 추도사처럼 생각되는 일부 활동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도원의 미래 계획, 기금 모음, 대중 연설등의 분야에서

수도원에 관여하였으며, 공동체 토론에서 항상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또 강연,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출연, 피정, 전례, 각종 행사등 독일과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상적이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철두철미 자기훈련과 동료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큰 기대감 때문에

때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관리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영감과 기쁨을 주었기에 그의 거대한 프로그램은

항상 그에게 삶의 영약(靈藥)이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가 받은 30개가 넘은 영예와 상 중에서 바이에른 공로 훈장, 독일 연방공화국 대십자 훈장,

바이에르 주 사회 공로 훈장, 두 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그뢰넨 바흐등 여러 명예 시민권등

참으로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고인이 생전에 뿌린 많은 씨앗에 감사드리며, 그의 마지막 위대한 여정이 그가 평생 동안 선포한 그 길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저절로 노트커 아빠스님을 통해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그대로 노트커 아빠스님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노트커 아빠스야!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립시다.

“주님, 노트커 아빠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4월10일(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성지순례를 온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갈매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조재형 신부)

 

2. 오늘 소개되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의 내용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교리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짧은 구절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대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게 한 말마디가, 또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합니다.

 

이런 죽음의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라틴어 경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수철 신부)

 

4월10일(수) <부활 제2주간 수요일>, 473(103)일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10일(수) 2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