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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4일 주일[(백) 부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4일 주일[(백) 부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차분히 살펴볼 때입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어려움과 슬픔이 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살아 숨 쉬기를 청하며,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합시다.

입당송

시편 66(65),1-2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이 백성이 영혼의 젊음을 되찾아 끊임없이 즐거워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바라며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3,13-15.17-19
그 무렵 베드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2.4.7.9(◎ 7ㄷ)
◎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
또는
◎ 알렐루야.
○ 저를 의롭다 하시는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소서. 곤경에서 저를 구해 내셨으니, 자비를 베푸시어 제 기도를 들으소서.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내가 부르짖으면, 주님이 들어 주신다. ◎
○ 많은 이가 말하나이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랴?”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 ◎
○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드나이다. ◎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2,1-5ㄱ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24,32 참조
◎ 알렐루야.
○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저희에게 지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저희가 세상의 빛과 어둠을 가려내고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을 잃고 있는 이 세상을 살펴 주시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전쟁을 멈추고 대화로써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존엄하고 그 무엇도 침해할 수 없으니, 이 땅에서 사형 제도가 하루빨리 폐지되게 하시며, 피해자 가족들도 위로하시어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친교의 주님, 주님 부활을 기뻐하는 저희 본당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며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가는 친교의 모범이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이토록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으니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4,46-47 참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으니,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바라며 기다립니다. 의심을 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3주일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2024 4 2일에 산티아고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신문에 성지순례 안내 광고를 냈습니다. 40여명의 순례자가 신청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산티아고는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도 산티아고 순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른 순례와는 달리 산티아고는 보는 순례가 아니라 걷는 순례입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을 걷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순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제게 산티아고 순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 13일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저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소임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새로운 소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났습니다. 그동안 준비하였던 산티아고 순례는 후임 신부님이 가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아쉬움을 아셨는지 새로운 방법으로 산티아고에 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전임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새로운 본당으로 온지 몇 달 되지 않았기에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이 다녀와도 된다고 하였고, 전임 신부님이 같이 가기로 했었기에 저도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주로 성모님 성지를 다녀오는 것인데, 그 길에 산티아고 순례도 있었습니다. 온전히 산티아고 순례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제게 산티아고 순례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년이 됩니다. 저는 이제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행복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친구를 만나 기억과 추억의 한 점이 됩니다. 이것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머무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축제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흘러간 물로 다시 방아를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다시 한 번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회개와 희망이 만나면 기회는 현실이 됩니다. 교회의 전례는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절이 매년 돌아오듯이 성탄과 부활은 매년 돌아옵니다.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저는 2024 부활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맞이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순환하는 시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기쁜소식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 있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부활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다음,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광이 드러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곧 앉은뱅이의 치유를 예수님 부활의 징표로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온 세상의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함께 하고 계심을 일깨웁니다. 

복음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깨우치시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그렇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을 열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당신 말씀의 영으로 하여 그 통로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3.부활 제2주간 토요일                                                            사도6,1-7 요한6,16-21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 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자애를  베푸소서.”(시편33,22)

 

오늘 화답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새삼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우리 삶의 중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일어나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작년 8.15일 광복절이후 계속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두팔을 번쩍 들으니

기도와 동시에 전신 운동도 됩니다. 

 

때로 집무중에도, 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가기전에도 바치는 몸과 마음이 하나된

만세기도입니다.

이보다 유쾌하고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참 많이도 권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삼위일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새롭게 고백하는 만세칠창의 기도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35년동안 여기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했던 강론 주제가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무질서에 방황과 혼란이요,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또 하나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10년 동안 참 많이 사용한 강론 주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및 우리 요셉 수도원을 생각하던중 떠오른 강론 주제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항해 여정”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은혜롭습니다.

인생항해 여정중인 주님의 제자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잠시 부활하신 주님이 부재할 때 어둠과 더불어 거세어지는 파도에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의 개입입니다.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자 거센 파도와 더불어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오늘 복음의 중심 말마디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I AM!)’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제가 40년전 이미 타계하신, 1970년대 한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당시 해직된

연대 김동길 교수의 특강때 들은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여 문을 두드릴 때 “누구요?” 물을 때 “나다!” 대답하는 아버지이고,

이때 “나가 누구요!” 묻는 사람 없을 정도로 자명한 존재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성 요셉 수도 공동체의 중심 자리, 십자로의 중심에 부활하신 예수님상 바로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마디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 공동체의 중심 자리에 머물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며 위로와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양한 두려움의 어둠에 포위되어,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하느님의 이름이자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영어 I AM에 보어 둘을 붙이면 하느님의 정체는, 예수님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 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나오는 고백이 시편 23장 1절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입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모두 통합니다.

 

성서에도 참 많이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이며 무려 365회 나옵니다.

날마다 우리를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용기백배, 사기충천케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항해 여정중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임을

다음 대목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바로 인생항해 여정중 삶의 기적을 상징하는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삶에 모실 때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앞당겨 미리 지금 여기서 목적지의 하늘나라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가 목적지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 요셉 수도원이 1987년에 설립되어 올해 37년째 인생항해 여정중인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요 주님께서 늘 공동체의 중심에서 함께 해 주셨음을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아 세상 바다를 항해하다 폭풍에 파선되거나 조난당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인생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을 선장의 중심 자리에 모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성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심 자리에 있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고 앞으로도 늘 보호래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도 깊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그 잘 나가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흡사 인생항해여정중 내적분열로 난파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외적의 침입에 망하는 경우보다는 내적 분열이나 부패로 무너지는 경우가 태반인데,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교회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차별로 인해 발생한 내분입니다.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불평을 터 뜨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공동체가 내분과 분열로 파선될 위험에 처한 순간 사도들의 분별력의 지혜와 신속한 결단의 행위로,

또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공동체는 다시 원상복구되어 계속 항해 여정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사도들의 빛나는 리더십이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고, 사도들은 참 기민하게 그들을 안수합니다.

마치 마리아의 관상가들과 마르타의 활동가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룬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니 공동체가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순탄대로 항해 여정에 오르게 됐음을 봅니다.

사도들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인생 항해 여정중의 공동체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지요. 

 

이래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수도원의 중심인 이 거룩한 성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 성 요셉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를 날로 견고히 해 주시며, 성공적 인생 항해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시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아멘.


4월14일(일) < 부활 제3주일 >, 되새김 구절

 

1. 부활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조재형 신부)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양승국 신부)

 

3.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하느님의 이름이자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영어 I AM에 보어 둘을 붙이면 하느님의 정체는, 예수님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나와 함께, 나를 위해 계신, 또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나오는 고백이 시편 23장 1절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입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모두 통합니다.(이수철 신부)

 

4월14일(일) < 부활 제3주일 >, 477(107)일 기도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부활하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 2024년 4월14일(일)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