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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5일 월요일[(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5일 월요일[(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착한 목자,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네. 당신 양 떼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8-15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11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또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기고 나서,
느닷없이 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기에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14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23-24.26-27.29-30(◎ 1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또는
◎ 알렐루야.
○ 권세가들 모여 앉아 저를 헐뜯어도, 이 종은 당신 법령을 묵상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 ◎
○ 저의 길을 아뢰자 당신은 들어주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 규정의 길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기적을 묵상하오리다. ◎
○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저는 진실의 길을 택하였고, 제 앞에 당신 법규를 세웠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물과 함께 바치는 저희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2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란 빛에서 나온 쪽빛이 더욱 파랗다는 뜻입니다. 기성세대는 다가오는 세대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지만, 다가오는 세대는 그들만의 능력과 창의력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 산업, 정보의 분야에서 인류는 분명 청출어람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의미도 잘 모르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공학, 로봇 등과 같이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를 떠난 지 2달이 되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터널도 있었고, 구독자의 감소도 있었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미안함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기우(杞憂)였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속도도 빨라졌고,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하였습니다. 제가 구축했던 홈페이지가 연탄 보일러였다면,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스보일러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 뉴욕에 더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하였지만, 제가 떠나온 것이 신문사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인사이동 때문에 예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청출어람을 기대하셨습니다. 비록 나약하고,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어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빵을 먹으면서, 잔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기억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의 설교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3,000명이 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교회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데 전념하기 위해서 7명의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7명의 부제들은 빵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하였습니다. 그런 부제들 중에도 청출어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았던 스테파노부제입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아집과 내가 다 할 거야!’는 욕망이 만나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공동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아집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을 향해서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청출어람들에게 신념과 열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직무를 시작한다면 청출어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열정과 헌신을 다 했다면 박수 칠 때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 3주간 월요일

복음요한 6,22-29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맙니다!

 

중국 남송의 시인이 남긴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만다는 것,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었더라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리네 인생의 자명한 진리를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찰나, 한순간입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지천으로 피어나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꽃들이 겨우 열흘 만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대자연 속에 거듭 반복되는 순환의 리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속절없이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 또 이렇게 세월이 가는구나. 또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내 인생이 저무는구나, 하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구나. 이 세상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래서 더욱 필요한 노력은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있는 대상, 불멸과 지속 가능한 대상을

찾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던 그 좋은 것들도 조금씩 색깔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더 백방으로 찾고 추구하고 얻기 워해 노력해야 할 불멸의 양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3주간 월요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우리 또한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5)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빵'은 이와 같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을 생명을 위해 먹는 것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 곧 성찬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안전과 보장, 편리와 유익만을 바라고 참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당신 목숨을 건네시는 ‘예수님’께 목숨 걸고 있지 않다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군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그렇습니다.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바로 그 양식을 지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

여기에서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들'(εργα)은 복수로 자신들을 주어로 제시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하느님의 일'(εργον)은 단수로 하느님이 주어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들이 믿는 일로 제시됩니다.

결국 그분이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함을 의미합니다.'(교리서 1069항)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일하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4.부활 제3주일                                              사도3,13-15.17-19 1요한2,1-5ㄱ 루카24,35-48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리이까?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34,7)

 

2008년도 시작된 왜관수도원 계간지 “향기로운 길, 분도”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니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2012년 봄호 18호에 실린 ‘산중한담(山中閑談)’란 ‘문(門)과 벽(壁)’이란 글이 앞부분을 나눕니다.

벌써 12년전 글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창문 좋은 방이 제일이다. 내 집무실이나 성당 내 자리에 지극히 만족하는 것은 좋은 창문 때문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창밖 풍경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도 없다.

굳이 그림이나 꽃꽂이가 필요없는 성당이고 집무실이다.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행복감을 느낀다.

창밖의 푸른 하늘을 그대로 하느님 마음 같기도 하고 얼굴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창밖을 보며 써놓은 시도 부지기수다.

예전에 써놓고 흡족해 했던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그림,사진...

 대부분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 보다 더 좋은

 임 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4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자다.”

 

12년전 그대로의 환경에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문과 벽’이란 위 글은 34년전 1990년 부활 제2주일 강론 제목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강론이었는데 제목의 신선함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이요,

그 이후로도 참 많이 생각했던 주제이고, 오늘 다시 사용하는 강론의 제목입니다.

영적 삶의 여정에 중요한 세요소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만남의 삶입니다.

만남들로 이뤄진 우리의 삶입니다.

참 좋은 만남은 우연도 당연도 아닌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니 우리 영적 삶은

말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 부활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지난주는 요한복음이었는데 오늘은 루카복음입니다.

분명 문은 닫혀 벽뿐이 방이었을 텐데 제자들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임재(臨在)하니 이 말마디를 너무 좋아하신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대구가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만남과 더불어 벽은 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의 만남과 더불어 선사되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의 절망과 슬픔, 두려움에 닫혀 벽같이 되었던 마음도

활짝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화와 더불어 기쁨의 선물이요 닫힌 벽같은 마음도 활짝 열린

평화의 문, 기쁨의 문이 됩니다.

 

둘째, 회개의 삶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 베드로의 열화같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도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이제,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요, 무지보다 인간에게 큰 걸림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바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탐욕, 교만, 질투 모두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이라 정의할만 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역시 인간 무지를 반영합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은 주님과의 만남에 이은 전적인 회개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게 돌아서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죄는 지워지고 무지에서 점차적인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벽은 변하여 지혜의 문이 될 것입니다.

온갖 내적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새삼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위해 평생 매일 바치는 영성훈련이 공동체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증인의 삶입니다.

사도들처럼, 성인들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해줍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자 사도들이 참 좋은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의 증인, 회개의 증인, 용서의 증인으로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힘찬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인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얼마나 장쾌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감동적 고백인지요!  

예전에 주님을 부인하던 그 나약하고 겁많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샘솟는 용기의 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 베드로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때,

교황님의 가르침의 주제도 용기(fortitude)였습니다.

현명(prudence), 인내(patience,) 정의(justive)에 이은 용기(fortitude)란 주제였습니다.

 

은총으로 유지되는 용기가 날마다 우리를 도우며 해결을 강화하고 장애를 극복함을 강조했으며,

‘용기없는 신자들은 무용한 신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 역시 부활의 증인이자 용기있는 사도로써

베드로의 진짜 후계자답습니다.

부활의 증인, 요한 사도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누구든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는 진리가 없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그분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에 항구할 때, 말그대로 

 

무지의 벽은 지혜의 문으로, 

두려움의 벽인 평화의 문으로, 

미움의 벽은 사랑의 문으로, 

슬픔의 벽은 기쁨의 문으로,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불신의 벽은 믿음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로 “벽이 변하여 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내외적 벽들이 활짝 열린 하나의 문, 주님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은 벽이 없는 온통 문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10,9).

아멘.


4월15일(월)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되새김 구절

 

1.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아집과 내가 다 할 거야!’는 욕망이 만나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공동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아집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을 향해서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청출어람들에게 신념과 열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직무를 시작한다면 청출어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열정과 헌신을 다 했다면 박수 칠 때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조재형 신부)

 

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구나. 이 세상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래서 더욱 필요한 노력은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있는 대상, 불멸과 지속 가능한 대상을

찾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던 그 좋은 것들도 조금씩 색깔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더 백방으로 찾고 추구하고 얻기 워해 노력해야 할 불멸의 양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의 만남과 더불어 선사되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의 절망과 슬픔, 두려움에 닫혀 벽같이 되었던 마음도

활짝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이수철 신부)

 

4월15일(월)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478(108)일 기도

 

복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15일(월)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