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3일 토요일[(백) 부활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3일 토요일[(백) 부활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입당송

1베드 2,9 참조
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로
저희 안에서 죄의 율법을 없애셨으니
저희에게 지워진 그 멍에도 치워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또는>
하느님,믿는 이들에게 파스카 신비로 자비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저희를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저희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언제나 하느님 뜻에 맞는 길을 걷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8-19(◎ 22 참조)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또는
◎ 알렐루야.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만물을 지으신 그리스도 부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네.
◎ 알렐루야.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7,24 참조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하시어,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2주간 토요일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의 기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1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다를 줄 아는 악기 한 가지 있을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공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를 꾸준히 할 것 그런가 하면 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할 것,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일 것, 중형차를 소유 할 것, 통장 잔고 1억 이상 일 것,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골프장이나 콘도 회원권 소유 할 것 프랑스와 한국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가치와 수치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존재와 소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는 도덕적인 가치, 인격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재화와 소유를 기준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기준으로 볼 때, 비록 재화와 소유가 적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끄럽지 않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볼 때, 도덕적인 허물이 있더라도,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재화와 소유가 충분하다면 중산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셨을 까요? 가난한 과부와 바리사이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을 하였지만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그것을 과시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단식과 희생을 다했음을 기도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비용이 들면 나중에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신분과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로마의 백인대장일지라도 굳센 믿음이 있다면 구원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성껏 봉헌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면, 우리가 굳센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중산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상류층은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나약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했지만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회개했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신앙의 상류층은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기도하였던 성모님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 성인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상류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상류층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고, 필요한 것들만 받았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궁핍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나눔과 기도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중산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상류층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강연 100도씨’에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건축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주호씨의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오른 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고 찍었고

길을 걸을 때도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오른손을 보였을 때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더욱 큰 상처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해야 할 때는 더욱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창피했고,

그러다보니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당에 갔을 때 새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머뭇머뭇 거리며 오른 손을 내밀었더니 신부님이 자기에게 호통을 치며 혼을 내었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러워서 손을 자신 있게 내밀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부님에게 야단맞은 것이 자신에게는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의 불완전한 손에 대해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무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야단을 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았지만 신부님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나니

‘두려움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구인 손에 대해 자신만 부끄럽게 느낄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 열등감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 안의 괴물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풍랑 속으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하자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아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함께 오십니다.

그 두려움을 거부하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고기 잡고 있던 시절 처음으로 예수님이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해서

많은 물고기가 잡혔을 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려움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하니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두려움도 이길 수 없고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렵습니다.

 

여자를 만날 때는 헤어질 것 때문에 두려웠고,

학생일 때에는 선생님이, 군인일 때는 선임 병이,

신학생 때는 신부님이, 신부가 되니 선배들이 무섭습니다.

아마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닫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고,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에게 핑계를 대게 된 것은

이제 자신 안에 죄가 들어와서 상대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남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내가 잘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상대의 문제입니다.

상대 안에 미움으로 가득 찼다면 내가 아무리 잘 해 주려 해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의 변화로 상대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놓으니 상대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나쁘게 보지 않도록 나를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정화해서 사랑으로 가득 채워 모든 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항상 그 두려움 뒤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품지 않으면 평화는 뒤따라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회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두려움이란 것이

그저 나의 그림자나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체의 겉모습은 밀떡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겉모습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선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나를 속이지 맙시다.

먼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그래야 자유와 평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2.부활 제2주간 금요일                                                              사도5,34-42 요한6,1-15

                                                               분별력의 지혜

                                                         -자비와 지혜의 주님-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예수님은 하느님의 화신이며 현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시편성무일도시 시편136장 1-26절까지 매절 후렴마다 흥겹게 반복되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비에서 자연스럽게 샘솟는 지혜요,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새삼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화신인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분별력의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는 빛을 발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분별력의 지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하며 아빠스의 최고의 자질로 일컫고 있습니다.

아빠스뿐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참 필수적 자질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성규 64장에서는 베네딕도의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분별력의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며,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놀랍게도 1500년전, 성 베네딕도의 분별력의 지혜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중용의 지혜를 지닌 ‘분별력과 절도’의 장상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분이, 분별력의 대가가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을 통해, 성체성사가 얼마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성체성사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와 지혜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복음의 빵의 기적이야기중 두 대목에서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바로 지나쳐버리기 쉬운 한 작은 아이의 봉헌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가 시큰둥하게 말할 때, 분별력의 지혜로 빛나는 주도면밀한

우리 주님이 이를 놓칠리 없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주님의 신속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말그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요, 작은 아이의 전적 봉헌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 기적입니다.

작은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전적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이요 군중들이었을 것이고,

이에 감동하여 저마다 먹을 것을 지닌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여 나눴을 것이니

바로 이것이 기적의 본질입니다. 

사실 복음의 작은 아이처럼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나눠 섬길 때 세상에 굶주리는 이들은

모두 사라지는 기적이 발생할 것입니다.

 

새삼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는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정성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아마도 미사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종 목표도 여기 나눔과 섬김에 있음을 봅니다.

또 하나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대하는 대목은 후반부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 놀란 군중은 “이분이 세상에 오시기로한 예언자다” 착각하고

억지로 모셔다가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광야에서 유혹했던 악마의 재차 침입이요,

이들의 속셈을 간파한 주님은 이들의 환호와 욕망에 유혹되어 영합하지 않고 단호히 이들을 떠나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갑니다.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절정의 빛을 발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지혜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에게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사도들의 용기있는 발언에 격분한 이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할 때,

바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분연히 일어나서 개입합니다. 

 

참 어른의 진가는 이런 때 들어납니다.

말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 가말리엘은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함으로 이들의 혼란을 잠재운채

참 평화롭게 끝냅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은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분별력의 지혜가 발휘된 처방의 조언인지요!

때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을 때는 잠시 하느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며

“1.건들이지 말고, 2.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공동생활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염추기경님이 여기서 피정할 때, “여기 있으니 건들이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

그냥 내버려 두어 좋아...”하던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정직은 최고의 정책’이요, ‘정직은 가장 오랜 간다’는 말마디 역시 정직이 지혜임을 말해 줍니다.

다음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지혜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근본이 서면 사람이 모이고, 말단을 추구하면 사람은 흩어진다. 사람을 모으면 세상을 얻는다.”

다산의 말씀이요, 근본을 세우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

대학에 나오는 말마디로, 덕을 추구함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화신인 자비와 지혜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자비하고 지혜로운 삶이요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비와 지혜의 사람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4월13일(토)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되새김 구절

 

1. 나눔과 기도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중산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초대교회는 신앙의 상류층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인으로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조재형 신부)

 

2.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가말리엘은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함으로 이들의 혼란을 잠재운채

참 평화롭게 끝냅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은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분별력의 지혜가 발휘된 처방의 조언인지요!

때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을 때는 잠시 하느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며

“1.건들이지 말고, 2.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공동생활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염추기경님이 여기서 피정할 때, “여기 있으니 건들이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

그냥 내버려 두어 좋아...”하던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이수철 신부)

 

4월13일(토) <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476(106)일 기도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13일(토) 5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