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8월 1일 목요일[(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하느님의 교회에 언제나 새로운 덕행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영혼들을 사랑하는 복된 알폰소 주교의 열정을 본받아
저희도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가 받은 상급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
○ 너희는 제후들을 믿지 마라. 인간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모든 계획도 사라져 버린다. ◎
○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주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로마 8,1-4)와 복음(마태 5,13-1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복된 알폰소가 자신을 거룩한 예물로 바치며
이 신비를 거행하게 하셨으니
저희 마음도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알폰소가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며
그 위대한 신비를 충실히 가르치게 하셨으니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끝없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낯선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이름, 직장, 메일,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저는 이름을 소개할 때 주로 세례명인 ‘가브리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브리엘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준 천사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쉽게 저를 기억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이름과 세례명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과 세례명의 뜻과 의미를 떠올리고, 그 의미에 맞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역의 이름을 따라서 성당 이름을 정합니다. 제가 있는 성당의 이름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댈러스는 지역 명칭이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주보성인의 이름입니다. 미주 지역의 성당은 대부분 한국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개신교회는 이름을 정하는 방식이 가톨릭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의 목사님과 공동체가 교회의 이름을 정하는데 지역의 명칭이나 주보성인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성인이라는 교리가 없고, 가톨릭처럼 속지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보면 ‘반석교회, 빛과 소금 교회, 광명교회, 온 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 방주교회’와 같이 성경에서 교회의 이름을 찾습니다. 한 목사님이 공동체와 함께 교회의 이름을 정했는데 ‘주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의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님도 아니고, 교회의 주인은 장로님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기에 ‘주님의 교회’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원칙에 따라서 10년만 목회하고 떠났습니다. 장로들도 임기를 정하고 모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이기에 큰돈을 들여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 큰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의 일부를 교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 재정의 50%는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고, 50%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금 봉투에 이름도 적지 않았고, 주보에 헌금 낸 교우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 이름을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어도 교우들은 기쁘게 헌금했다고 합니다. 1년 예산을 정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지출했다고 합니다. 다만 모든 지출의 원장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지출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예산을 정하면 그 예산에 부족한 금액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금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예산을 정하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걸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니, 35년이 지났어도 공동체는 사랑과 기쁨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옹기장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 진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과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진흙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더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인간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모든 계획도 사라져 버린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우리의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절대 아닙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7간 목요일
마태오 13,47-53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구분법
오늘 복음에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비유 말씀으로 어부가 물고기를 거두어들여
어떤 종류는 거두어들이고 어떤 종류는 버린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물고기일까를 알아보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물고기들이 거두어들여지고
어떤 물고기들이 버려지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버려지는 물고기들의 특징을 봅시다. 그것들은 맹독성이 있거나 가시가 많거나
잡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사람이 손쉽게 먹기 어려운 이런 물고기들은 사실 다른 물고기들에게도
천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기 어려우면 다른 물고기들도 먹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복어를 볼 수 있습니다. 복어는 지금 양식을 해서 독성이 없이 잘 먹기는 하지만,
예전에 복어가 그물에 들어왔다면 어떨까요? 처음엔 분명 버려졌을 것입니다.
복어는 물이나 공기를 삼켜 몸을 부풀려 몸을 더 크게 만들고 삼키기 어렵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부풀어 오를 때 직립 되는 가시를 가지고 있어 추가적인 방어층을
형성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복어의 조직에는 강력한 신경독인 테트로도톡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독소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어 복어를 먹으려는 시도를 방해합니다.
라이온피쉬는 생긴 것은 멋있지만, 지느러미에 길고 독이 있는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시는 잠재적인 포식자에게 독을 주입하여 극심한 통증, 마비, 심지어 사망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밝은 색상과 뚜렷한 패턴은 다른 동물에게 독이 있다는 경고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라이온피쉬는 그것들을 걸러내고 식용을
하기에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서 일반 어부들에겐 버려지기에 십상입니다.
스톤피쉬는 독과 위장술로 거의 공격을 받지 않으며 만약 밟거나 만질 경우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독이 있는 가시가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어와 같이 특별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먹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쓸모없는 물고기입니다.
전기뱀장어를 볼까요? 전기 뱀장어는 강력한 전기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전기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뱀장어가 발생시키는 전기 충격은 잠재적인 포식자를 기절시키거나
죽일 수 있어 효과적인 억제 수단이 됩니다. 다른 물고기들에게 해를 끼치는 전기뱀장어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어 식용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상어는 어떻습니까? 가장 강한 물고기이기에 천적이 없습니다. 즉, 상어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사냥 능력과 자연 포식자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서식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상어의 지느러미를 먹기 위해 상어를 포식하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해 상어를 잡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물고기들에게 먹혀 영양분을 줄 수 없는 독성이 강하고
다른 것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험한 가시들이 있는 물고기는 인간에게도
이롭지 못하기에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물고기가 인간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먹혀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밥이 될 줄 아는 존재가 됨을 배우는 과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성장해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 거리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독기를 품고 가시를 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신부님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일생 그를 괴롭힌 다릿병과 신세만 한탄할 게
아니라 자신도 이웃을 위해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좋은 물고기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쏟았으며, 로마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병자들을 위한 봉사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신보다 더 아픈 이를 돌보다 하느님께 갔습니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의 조건입니다.
물론 먹히는 것은 아픔입니다. 어차피 독과 가시를 품고 사는 것도 아픔입니다.
그것보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것을 배운 이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듯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먼저 이웃에게 밥이 되어주어
이웃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현대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7.31.수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예레15,10.16-21 마태13,44-46
보물찾기
“일상이 보물밭이다!”
“내 힘이시여, 당신께 이 눈이 쏠리오니,
하느님은 나의 성채시나이다.”(시편59,10)
오늘 역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살 수 있는 비결을 배웁니다.
바로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두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진정 이런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이들이 참부자요 참행복한자요 참자유로운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모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하늘 나라의 보물입니다.
사람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참보물을 찾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 참보물을 찾지 못해 방황이요 불안이요 혼란입니다. 길을 찾는 마음, 희망을 찾는 마음,
빛을 찾는 마음은 바로 이런 참보물을 찾는 마음입니다.
평생 이 참보물을 찾지 않고, 찾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참보물을 찾아 행복한 인생 살아보라고 주어진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참보물을 찾지 못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참보물의 발견이요 소유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라 다 희망이 아니듯, 평화라 다 평화가 아니듯 보물이라 다 보물이 아닙니다.
거짓 보물이 아니라 참보물이, 가짜 보물이 아니라 진짜 보물입니다.
참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보물을 찾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선물을 보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런 보물은, 참보물은 돈주고 사오거나 빼앗아 올 수 없고, 새삼 간절히 찾을 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어린 시절, 봄소풍이나 가을소풍때 소풍이 끝날 무렵에는 꼭 보물찾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자 마자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하려 이리저리 뛰는 아이들이요,
보물 종이 쪽지를 발견했을 때, 설렘의 기쁨은 얼마나 황홀했던지요!
지금 생각하면 하잘 것 없는 보물이었지만 당시는 가슴을 가득 채워 설레게 했던 보물 종이 쪽지 였습니다.
이 보물 종이 쪽지를 하나도 찾지 못했을 때의 쓸쓸하고 허전함 또한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보물찾기! 참 심오한 상징입니다.
새삼 우리는 보물찾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참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참보물을 찾는,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이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일상이 보물밭입니다. 제가 볼 때 눈만 열리면 함께 하는 형제들이, 매일 만나는 이들이 보물입니다.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는 우리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그 고유의 참보물입니다.
사람이 희망이듯 사람이 보물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 좋고, 건물이 좋고, 전통이 좋아도, 그 수도원 건물 안에 살아 있는
보물 수도자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수도자를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이런 사람 보물, 아기 보물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애완견이 반려견이 자리하고 있는
병리적 쓸쓸한 현실에 개탄합니다.
결코 사람 보물을 대체할 수 없는 애완견, 반려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아이들만 보면, 젊은이들만 보면 너무 반갑고 사랑스러워 살아 있는 보물을 발견한 듯
신기하고 기쁩니다.
하느님은 보물찾기의 달인이요 대가요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하는 가톨릭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이, 교회가 찾아 낸 최고의 보물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세상이 교회가 필요로 할 때 하느님은 성인 보물을 찾아 보내주십니다.
꽃의 색깔, 향기, 모양, 크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시대 마다, 환경 마다 보내 주신 성인 보물들은 다 다릅니다.
오늘 하느님은 정말 기막힌 살아 있는 보물을 찾아 혼란한 세상, 교회에 보냈으니
바로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을 하며 예수회에 견고한 토대를 놓았던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입니다.
성인의 생애와 활약은 참으로 눈부십니다.
이런 보물을 찾아내신 하느님의 눈이 경탄스러울 뿐입니다.
당시 16세기는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큰 위기를 겪을 때 였고, 중세 초에 베네딕도 성인을 보내 교회를 구했고,
12세기 경에는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교회를 구했고, 16세기에는 성 이냐시오를 통해
종교개혁의 격랑으로부터 교회를 살렸습니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예수회의 활약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현재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예수회 출신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표어이자 예수회의 표어입니다.
예수회 전 회원이 이 단일 목표를 향해 매진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더불어의 여정,
회심의 여정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가지 목표는 1.교육에 힘쓰고, 2.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3.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후방에는 ‘베네딕도 수도회’가 있다면, 세상 한복판 최전방에는 일당백의 최정예의 전사들의 수도회인
‘예수회’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교회를 위한 기막힌 상호보완의 관계였음에 감탄합니다.
역시 믿는 이들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성인 축일은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이 되어 살라고 있는 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으며, 인생 유일한 존재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성인들이 누구입니까? 보물중의 보물인, 유일한 참보물인 예수님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만난 분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똑같습니다.
한두번 찾았다, 만났다 하여 끝나는 참보물 주님이 아니라 매일 일상의 보물밭에서 찾아 만나야 합니다.
참보물을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려 세상 진짜 보물들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놀라운 보물이 된 것은 참보물 주님을 평생 찾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다음일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참보물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감동깊게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살아있는 참보물인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관계가 주님을 닮은 살아 있는
참보물 예레미야 예언자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두 번째 고백중 주님과 주고받는 진솔한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곧 이어 반전입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아, 또 반전입니다.
예언자의 회의, 고뇌, 아픔이 욥처럼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최종적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내 앞에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의 영원한 살아 있는 참보물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참보물이 되어 살게 합니다.
평생 보물찾기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시니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내 힘이시여 당신을 찬양하오니,
주는 내 성채, 나 하느님, 내 사랑이시니이다.”(시편59,18). 아멘.
8/1(목)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옹기장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 진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과 사람입니다. 세상 만물은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진흙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더불어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반영억 신부)
2.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양승국 신부)
3.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물고기의 조건입니다.
물론 먹히는 것은 아픔입니다. 어차피 독과 가시를 품고 사는 것도 아픔입니다.
그것보다 이웃을 위해 아파질 줄 아는 것을 배운 이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듯이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먼저 이웃에게 밥이 되어주어
이웃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4.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표어이자 예수회의 표어입니다.
예수회 전 회원이 이 단일 목표를 향해 매진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더불어의 여정,
회심의 여정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가지 목표는 1.교육에 힘쓰고, 2.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3.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수철 신부)
8/1(목) [(백)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제41일차 기도
복음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역사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심에 감사합니다.
늘상 변화하시는 하느님이심에 감사합니다.
- 2024년 8월1일(목) 9시3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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