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8월 28일 수요일[(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3,6-10.16-18
6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6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4,7-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저희가 구원의 제사를 거행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오니
이 자비의 성사가 저희에게 일치의 표지가 되고
사랑의 끈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 스승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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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며칠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너무 힘듦’이랍니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1달간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기로 한 미국 신부님이 못 오신다고 해서 영어미사를 했고, 대건회 모임, 사목회의, 구역모임을 다녀왔습니다. 구역장 회의, 세례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병원방문, 포트워스 한인 성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듯이 실내는 에어컨의 힘으로 서늘한데, 바깥은 따가운 햇볕이 강해서 목감기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을 ‘너무 신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아픈 사람이 위로를 받고, 힘든 사람이 용기를 얻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이렇게 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 더하기 일’은 ‘너무 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원고 교정하고, 신문 홍보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팬데믹 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내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하느님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인생에는 적어도 몇번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서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 인생을 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는데도 온 줄도 모르고,
그 소중한 대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끔씩 자신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틈나는 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입니다.
한번씩 인생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탈탈 털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반전의 시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쳤을 때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가,
곧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대 성인이자 학자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껌 좀 씹는 청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보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 명예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발생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에
널리 팽창되던 종교였습니다.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니교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마니교는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함께 인생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386년 가을이었습니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고향 친구 폰시아노가 찾아옵니다.
폰시아노는 최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깊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자들,
특히 안토니오의 성스럽고 빛나는 영적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우구스티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애를 쓰고 있는데,
공부 꽤나 했다는 우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은혜로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갑작스런 내면의 변화을 주체하지 못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며 기도하던
아우구스티노의 귓전에 한 애띤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즉시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책상 위해 놓여 있는 성경을 들어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 성경 구절은 다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생명수같은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해줄 은혜로운 말씀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오늘 복음도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그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선으로 꾸며진 위선'입니다.
마치 자신이 '선'인양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선’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은 악취가 더 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혹은 미사나 전례나 성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단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올가미에 씌우기도 합니다(예레 18,18).
실제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러했습니다(마태 22,18).
또한 ‘위선’은 자신을 완고하게 하고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로 삼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루카 18,9; 20,20)
그래서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 가르치는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지만 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 해도, 진리는 가리고 있는 허울을 어김없이 벗기고 말 뿐입니다.
어둠이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할지라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막을 태우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더러운 속을 감추고,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27.화요일 성녀 모니카(331-387) 기념일 2테살2,1-3ㄱ.14-17 마태23,27-32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자녀들이여!” 오늘도 옛 현자의 분별의 지혜를 강조한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다퉈야 하는 상황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분별이다.”<다산> “공자가 말했다. ‘자로가 용맹을 좋아함은 나보다 낫지만, 사리를 헤아려 분별하는 바는 없다.”<논어> 오늘은 성녀 모니카 기념일입니다. 56년의 짧은 생애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한권의 감동적인 성경책 같습니다. 내일은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념일입니다. 이렇게 모자분이 나란히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일은 가톨릭교회 초유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잘 둔 자식들입니다. 이래서 성모님은 물론 성녀 모니카가 뭇 어머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불행선언 셋에 이어 두 개의 불행선언이 뒤를 잇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눈먼 무지의 사람들인지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고질적 무지란 병의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치유의 답은 오직 하나 부단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뿐이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십일조의 거부가 아니라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실을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요 이것은 분별의 지혜에 속합니다. 바로 우선적이 중심 가치인 의로움, 자비, 신의를 우선 분별의 잣대로 삼으라는 것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진리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표리부동이 아닌 안과 밖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안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이니 겉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시절 영어선생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겉옷보다는 속옷이, 속옷보다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일 때 비로소 탐욕과 방종의 혼탁하고 무질서한 내적 현실도 비로소 정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어제와 반대로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자녀들이여!”로 정했습니다. 무지의 처방이 지혜요, 참지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랑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당대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하느님 중심의 전통을 충실히 지킴으로 정체성을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격려도 참 목자의 가르침처럼 따뜻하고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열매가, 하느님 은총의 열매가 오늘 기념하는 성녀 모니카입니다. 얼마나 슬기로운 성녀인지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 증언합니다. 고백록 9권 후반부 반은 성녀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로 가득합니다. “성녀는 나이가 훨씬 연상의 이교 남자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했는데 그는 정력이 넘치고 폭력적 성향에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가정폭력이 일상적이었지만 모니카는 남편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그는 결코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그녀의 자선과 기도가 짜증나게 했지만, 그가 그녀를 존경하도록 이끌었다. 성녀의 상냥함(sweetness)과 인내는 다른 학대받는 아내들과 어머니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그녀가 그들처럼 고통을 겪었음을 알았고 그녀의 모범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 성녀는 매우 신심이 깊었고 매일 교회 전례에 참석했으며 그것은 인내의 덕을 닦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녀는 힘든 결혼생활을 하는 다른 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너희가 혀를 잘 다스린다면, 너희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네 남편은 좋아질 것이다.’ 사실 성녀는 단 시간에 시어머니를 사로 잡았고, 이교 남편도 개종에로 이끌었고, 그의 난폭했던 기질도 진정시켰다(calmed). 후에 아들은 마니교도가 되었고 성녀는 아들이 바뀌지 않자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자 주교는 성녀에게 말했다.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많은 눈물의 아들이 멸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남편이 죽자 성녀는 아들이 있는 밀라노로 갔고,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덕분에 모니카는 17년 기도후 아들이 나이 28세, 개종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그가 밀라노의 성 요한 세례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후 모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던중 모니카는 티베르강 어귀 오스티아에서 387년 56세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내가 죽기전에 네가 신자가 되는 것 하나뿐이었다. 내 하느님은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 나는 이제 지상의 모든 행복을 멸시한 주님의 종이 된 너를 보게 되었구나. 내가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니?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드님의 증언입니다. 끝까지 옆에서 임종을 지켜본 성인의 결론 말씀입니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 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성염, 고백록 337쪽)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저절로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성녀 모니카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여!”란 고백과 더불어 인류에게 위대한 성인 모자분을 선물한 하느님께 끝없는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녀 모니카는 인내와 아내들, 어머니들, 학대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혜로운 믿음의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참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8/28(수)[(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하느님 중심의 전통을 충실히 지킴으로
정체성을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격려도 참 목자의 가르침처럼 따뜻하고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8/28(수)[(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68일차 기도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8월28일(수) 7시1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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