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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4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4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86(85),3.5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2-13.14-15.20-21(◎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보신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빚으시고, 그들의 행위를 속속들이 헤아리신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

복음 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20 참조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시몬 장모의 열병.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자동차에는 많은 기능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유리창을 닦아주는 와이퍼가 있고, 유리창의 먼지를 벗겨주는 워셔액 분사기가 있습니다. 냉난방을 조절하는 에어컨도 있고, 시트의 온도를 조절하는 열선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있고, 속도를 조절하는 쿠르즈 컨트롤도 있습니다. 방향을 유지하는 자율 주행 장치도 있고, 차량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도 있습니다. 차선을 변경하는 깜빡이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깜빡이는 운전자는 물론 주위에 있는 차를 위한 기능입니다. 옆 차선의 차가 나의 차선으로 오겠다고 신호하면 나는 속도를 줄여서 올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내가 옆 차선으로 가고 싶을 때 신호하면 뒤에 오는 차도 속도를 줄여서 배려해 줍니다. 비상등도 있습니다. 양쪽 깜빡이가 모두 켜지는 상황입니다. 앞의 차가 비상등을 켜고 있으면 속도를 줄이고, 뒤에 오는 차를 위해서 똑같이 비상등을 켭니다. 그렇게 하면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뒤에 차가 있든 없던 상관없이 방향을 바꾸려면 깜빡이를 켜는 습관을 익히면 좋습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깜빡이는 중요합니다. 깜빡이가 필요한데 지켜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저는 국회에서 그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증인을 불러놓고 질문하면서 증인의 답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증인이 답변하는데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도 하고, 야단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원이 질의 하는데, 상대 당의 의원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차가 엉켜서 교통의 흐름이 엉망이 되는 것처럼 국회의 운영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회의 할 때도 가끔 깜빡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소리가 큰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가끔 안타까운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예전에 해 보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힘만 들고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분위기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진행자는 방향을 정해 주면 좋습니다. 먼저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 좋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방향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코린토인들 사이에 차가 엉켜서 오도 갈 수 없는 것처럼 분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향 설정은 없습니다. 이런 방향을 망각하면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곤 합니다. 성직자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악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말씀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수도자의 침묵과 기도에서 믿음의 향기, 희망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교우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은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키우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늘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루카 4,38-44

 

병고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고가 찾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분들, 얼마나 고통이 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때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 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불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앞에서는, 그런 힘겨운 상황 앞에서도

그런 끔찍한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주님 자비와

섭리의 손길에 하루하루를 맡기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3 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제64대 교황 학자(540-604) 축일 
                                                                                                            2코린 4,1-2.5-.7 루카22,24-30


                                    착한 목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종과 섬김의 영성”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각별한 인연의 중요성 때문에 ‘기념일’이 아닌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로 지냅니다.


베네딕도 성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동시대 분으로 성인을 참으로 흠모하여 ‘베네딕도 전기’도 썼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섬김’에 있어
이분들을 능가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갈망의 사람, 배움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걸작품에 속하는 분들입니다.
두 분이 바로 중세초 혼란기에 있던 유럽을 구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누구보다도 수도생활을 사랑하여 자기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평생 수도원에서 하느님만 섬기며 살려했던 분인데 교회에 순종하여 섬김의 교황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두 분을 길러낸 하느님 솜씨에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두 분 축일 미사시 입당송도 흡사한 느낌입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오늘 입당송>


“베네딕도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 입당송>


교황님이 참으로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천재인지 그 업적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황직만해도 벅찼을텐데 영국에 선교사들 파견, 야만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수호,
그리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보면 도대체 어느 시간에 저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지 정말 불가사의의
르네상스적 인물입니다. 


다음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최상에 속하는 분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는 자는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다.
곤경에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경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등이다.”<논어>


최상의 타고난 것에다 부지런한 노력까지 더하니 천하에 당해낼 자 없을 것입니다.
전례개혁도 독보적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물론 미사중 빵 나눔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님의 창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정말 질그릇 속에 엄청난 하느님의 보물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 성인 교황뿐 아니라 우리 역시 질그릇들 속에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둘뿐입니다.
교황 재위 14년 동안이지만, 교회 발전과 중세 교황직의 발전에 영향은 멀리멀리 미치기에
대 교황이라 불립니다. 


그 옛날 분이 흡사 현대인처럼 느껴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교황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노 였듯이, 성녀 실비아의 아들이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요,
또 생각나는 성녀 헬레나의 아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얼마나 하느님을 잘 섬기며 돌봐드렸는지, 선종하자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쇄도하는 요구에 시성되었고, 묘비명도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일치되는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의 표본이 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흡사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분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이해한 참 멋진 교황이며,
후임 교황들 역시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섬김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결코 군림하는 자나 권세를 부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바로 섬김의 모범인 주님이 계심을 깨닫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요, 이런 주님을 섬길 목적으로 생긴 것이
베네딕도 수도 공동체이기에,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종과 섬김의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복음적 영성이요,
우리에게 직무가, 권위가,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여정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섬김을 배워가며 살아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자마자 9.2-9.13일까지 제45차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4개국(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동티모르, 싱가포르) 해외 사목 순방길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섬김의 직무에 열정을 다하시는 충실하신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저보다 무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이나 영성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분발하게 합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의 생애 대부분 수도생활 초기 지나친 고행 생활로 통풍과 소화장애로
고통을 겪었지만 지적으로는 끝까지 활력넘치는 삶이었으나, 선종 몇 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극도의 병고중에 지냈습니다.
604년 선종전 교황님의 일기에 나와 있는 기록의 상황도 눈에 선합니다.


599년 일기에는 
“열 한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과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라 썼고, 


600년에 일기에는 
“나는 근 2년 동안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서 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고 적었으며, 


601년 일기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썼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한 교황님의 마지막 고통의 생애가 순교자 성월 9월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구가 우리 모두 9월 순교자 성월,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9/4(수)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향 설정은 없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은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둘뿐입니다.
교황 재위 14년 동안이지만, 교회 발전과 중세 교황직의 발전에 영향은 멀리멀리 미치기에
대 교황이라 불립니다. 

그 옛날 분이 흡사 현대인처럼 느껴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교황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 성 아우구스티노 였듯이, 성녀 실비아의 아들이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요,
또 생각나는 성녀 헬레나의 아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얼마나 하느님을 잘 섬기며 돌봐드렸는지, 선종하자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쇄도하는 요구에 시성되었고, 묘비명도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일치되는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의 표본이 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입니다.

(이수철 신부)

 

9/4(수)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75일차 기도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 2024년 9월4일(수) 6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