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6일 금요일[(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4,1-5
형제 여러분, 1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네.
○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 ◎
○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 ◎
○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주님은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 버리지 않으신다. ◎
○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구하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https://blog.kakaocdn.net/dn/bUETCG/btsJt1tful6/xmCU7iksOhVtAQoDWh7Bn1/img.png)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5,33-39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생활 양식!
인류 역사 안에서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고 확산되어 보편화될 때 겪는 저항이나 혼란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가치 회복의 과정이었지만, 노예 제도의 폐지나 흑인들의 인권 회복,
어린이나 청소년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여성들의 위치나 신분이 신장되는 과정 등에서 넘어야 할 산이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를 큰 고민과 혼란으로 밀어 넣는 새로운 가치들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AI 등 최첨단 매체의 대중화와 일반화로 인해 겪는 가치관의 혼돈 등입니다.
십 년, 이십 년 전만 해도 남녀 수도회는 한 수도자가 스마트폰을 개인으로 소지하는 문제로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마트폰이 아주 탁월한 사목과 친교, 기도와 복음 선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과몰입이나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서 새로운 가치나 문화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지녀야할 능력이 있으니,
복음이란 프리즘에 비춰 균형잡힌 해석을 하려는 노력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가치와 문화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이 거듭되었는데,
그중 가장 특별하고 엄청나며 고귀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인물의 등장일 것입니다.
가장 감미롭고 부드러운 풍미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며, 우리 모두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
이른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자마자 우리 인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고수해오던 가치나
생활 양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셨습니다.
왕은 더 이상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맨날 구박받고 얻어맞던 노예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손가락질 당하던 이방인이나 세리나 죄인들도 벗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한가지 강력한 요청을 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생활 양식, 즉 복음적인 삶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서 함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루카 5,34)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6-38)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곧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준 이 나라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과 더불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5,38)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5.연중 제22주간 목요일 1코린3,18-23 루카5,1-11
성소(聖召)의 여정
“우연(偶然)은 없다, 모두가 은총(恩寵)이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모두가 성소의 여정 중에, 섭리 은총중에 살아갑니다.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런 깨달음입니다.
성소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결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죄입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이 성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바르지 않은 길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헤매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다산>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삶이 바쁘고 힘들 때, 멈춤 줄 아는 것도 참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 상징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의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중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은총이 선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의 배에 오르실 때 이미 예수님은 시몬을 점찍어 뒀음이 분명히 감지됩니다.
우리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가시는 주님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잡아 끌어 올릴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했지만 허무와 무의미만 가득 길어 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공허의 텅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런지요!
코헬렛 고백처럼 평생을 살아도 헛되고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시편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님이 빠진 삶은 헛된 삶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시몬은 겸손하고 지혜롭게도 순종을 택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됩니다.
놀라운 은총, 충만한 행복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즉각적인 고백이 평생 묵상할 내용으로 참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로 얼룩진 내면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성인들의 공통적 반응이 죄인이라는 자각입니다.
아브라함(창18,27), 욥(42,6), 이사야(이6,5)의 체험도 이와 흡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죄로 얼룩진 참나의 얼굴을 보고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마음에 참나의 얼굴을 회복합니다.
시몬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고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뒤따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소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은 단번에 끝난 듯 하지만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계속됐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도 바오로는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전서 말씀은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음이며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텅비운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한다는
체험적 고백에 공감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허황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대우(大愚)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역설적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절정을 나눠줍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대우이자 대지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목표하는 영적 최고봉의 경지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성소의 여정중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하느님으로 가득한 참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소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대지(大智)의 역설적 참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9/6(금) [(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자마자 우리 인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고수해오던 가치나
생활 양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셨습니다.
왕은 더 이상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맨날 구박받고 얻어맞던 노예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손가락질 당하던 이방인이나 세리나 죄인들도 벗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한가지 강력한 요청을 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가치이신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생활 양식, 즉 복음적인 삶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5,38)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음이며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텅비운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한다는
체험적 고백에 공감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허황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대우(大愚)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역설적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절정을 나눠줍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9/6(금) [(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77일차 기도
복음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5,38)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6일(금) 9시20분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4년 9월 8일 주일[(녹) 연중 제23주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4.09.09 |
---|---|
[매묵]2024년 9월 7일 토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6) | 2024.09.07 |
[매묵]2024년 9월 5일 목요일[(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09.05 |
[매묵]2024년 9월 4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3) | 2024.09.04 |
[매묵]2024년 9월 3일 화요일[(백)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