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5일 목요일[(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3,18-23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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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예전에 선배들은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냉장고 광고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성탄 선물로 ‘목도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구역장님과 백화점엘 갔습니다. 저는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대충 사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총구역장님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좋은 목도리를 찾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백화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드릴 성탄 선물을 골랐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물가에서 지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동하면 물을 구하기 어렵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왜 이동했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왜 이동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고, 다행히 모두 저의 이야기를 따라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자리를 이동한 것에 대해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답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되면서 ‘판단력’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저의 결정과 저의 판단이 최종 결정과 판단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수정하거나, 번복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비교적 판단하기 쉽습니다. 차 축성, 가게 축성, 봉성체에 대한 부탁은 시간을 정해서 약속을 잡으면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성당 안에서 홍보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성당 밖에서 명함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가정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1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형제님을 위한 기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교우들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부모님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부모님은 브루클린 교우들의 영상 인사를 스마트폰에 담아 왔습니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이나, 성전 이전과 같은 문제는 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공동체의 의견이 나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판단의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의 어부들도 판단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치라고 하셨고,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어부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판단 기준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5,1-11
참담한 실패 체험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습니다!
출가 이전 뱃사람이었을때 시몬의 외침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시몬의 체험과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반복해온 체험이요 외침이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해보겠다며, 한번 보란 듯이 대박 내 보겠다며 밤잠을 줄이고 건강까지 해쳐가며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하고 초라한 꽝이었습니다.
비참함과 자괴감에 당당하던 어깨는 축 처지고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위축됩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참담한 실패의 새벽을 맞이하는 시몬과 우리입니다.
참담한 경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인간의 힘, 인간의 경험, 인간의 능력만 믿은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난다긴다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안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끝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물러날 곳 없어 보이는 벼랑 끝에서 하느님이 시작하십니다.
돌아보니 참담한 실패 체험에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할 곳에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때, 내 이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들어높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할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일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객체가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 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4.연중 제22주간 수요일 1코린3,1-9 루카4,38-44 주님 중심의 삶 “하느님 나라의 비전, 치유, 분별의 지혜”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 보신다.”(시편33,12-13) 세월 흘러 세속화 되어 갈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새벽 유투브 동영상 뉴스를 얼핏 보니 3대 사찰 중 하나인 가야산의 해인사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들었다 하며 대부분 사찰이 그렇다 합니다. 종교가 본연의 사명을 잃고 속화되어갈 때의 자업자득이겠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적 현상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팔십억 명의 손가락질은 피할 수 있어도, 내면에 있는 부끄러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다산> 그 누구도 가장 가까이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어디로 가도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니 무섭구나.”<대학> 열 눈이, 열 손이 상징하는바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입니다. 새벽 수도원 숙소의 문을 열면 전개되는 풍경은 늘 새로워 흡사 하느님을 뵙는 듯 저절로 나오는, 며칠전 인용했던 고백시입니다. “문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가리키는 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삶의 중심에, 치유의 중심에 하느님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 자체가 힐링이자 치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릅니다. 주님을 만나는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의 치유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치유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보여줍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중요한 사실은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즉시 주님의 일행을 섬기는 시중드는 일에 몰입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이웃을 섬기라 있는 치유의 건강임을 배웁니다. 이어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니 예수님은 명실공히 치유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시니 마귀들도 소리 치며 도망갑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왕성한 치유 활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예수님 삶 중심에 늘 자리하고 있던 ‘외딴곳’입니다. 제 외딴곳은 성전에 붙어있는 집무실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예수님의 외딴곳은 아버지와의 만남인 기도터이자 쉼터요, 삶의 중심이자 전체를 멀리 깊이 내다보는 초월적 거점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삶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자신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군중들을 홀연히 떠나 전도 여행에 복음 선포의 순례길에 오른 주님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모두의 근원적 갈망이, 목마름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만이 참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되어 살 수 있고,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이 참 적절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분별의 지혜는 바로 주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편인가 아폴로 편인가 편가르기 하는 육적이며 속된 신자들을 향한 현자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아폴로와 나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처럼 상호보완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질서의 교회공동체요, 주님 중심의 삶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참 좋은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치유와 분별의 지혜 은총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시편33,20). 아멘. |
9/5(목) [(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조재형 신부)
2. 놀랍게도 인간의 끝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물러날 곳 없어 보이는 벼랑 끝에서 하느님이 시작하십니다.
돌아보니 참담한 실패 체험에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할 곳에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때, 내 이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들어높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할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일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모두의 근원적 갈망이, 목마름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만이 참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되어 살 수 있고,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9/5(목) [(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76일차 기도
복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2024년9월5일(목) 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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