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11일 수요일[(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11일 수요일[(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19(118),137.124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5(44),11-12.14-15.16-17(◎ 11ㄱ)
◎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네 백성,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 임금님이 너의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 임금님은 너의 주인이시니, 그분 앞에 엎드려라. ◎
○ 화사하게 한껏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오색 옷 단장하고 임금님께 나아가는구나. 처녀들이 뒤따르며, 동무들도 오는구나. ◎
○ 기쁨과 즐거움에 이끌려, 임금님 궁전으로 들어가는구나. 당신 아들들이 조상의 뒤를 이으리니, 당신이 그들을 온 땅의 제후로 삼으시리이다. ◎

복음 환호송

루카 6,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알렐루야.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참된 믿음과 평화를 주셨으니
저희가 예물을 바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합당히 공경하고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42(41),2-3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강론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교회에서 찬양 때 부르는 성가를 복음성가라고 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종교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던 노래가 있습니다. 복음성가이면서도 방송에서 많이 소개되었던 노래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가사나 멜로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혹시 제목이 기억나시는 분 있으신가요? 1997년에 발표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찬양 성가로 불렀는데, 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당시 우리 사회가 ‘IMF'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회사가 쓰러졌고, 많은 직장인이 실직했습니다. 경제위기는 가정의 위기, 개인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역과 을지로에는 노숙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교구청에 있었습니다. 강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을지로 지하상가에 있는 노숙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물가에서 힘차게 끌어올린 공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듯이, 박세리 선수의 우승은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IMF'의 거센 파도에 침몰할 것 같았던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 맺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그것만으로도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천년에 한번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바위를 스치고, 그 스치는 옷자락으로 바위가 사라지는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시간은 억만년도 더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인연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 하였고, 말도 잘 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 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6,20-26

 

참된 행복은 결핍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7천원 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일까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불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또한 눈치보고 비위 맞추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나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게 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10.연중 제23주간 화요일                                                        1코린6,1-11 루카6,12-19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 사도다운 삶

                                                            “기도가 답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열정, 피곤하거나 지친 모습이 전혀 없는 영원한 청춘,

교황님의 활약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어제는 동티모로 국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믿음의 토착화를 강조하신 연설 한 대목이 참 신선했습니다.

 

“날마다 자기들의 믿음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문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주로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순교자성월 10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은 명실공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수확의 계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생명줄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들의 삶은 살아있는 듯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사람

모두에 대한 정의입니다.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기도가 답입니다.

여전히 날마다 만세칠창 기도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하느님 감사로 끝나는 하느님 중심의 하루요 일생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기도와 회개, 깨어있는 삶은 늘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오르막길은 어렵지만 끈기로 성취할 수 있고, 내리막길은 쉽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다산>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담이 무너지듯 순간이다.”<다산>

 

젊을 때나 노년이나 한결같은 기도의 삶이 제일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는’,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지혜도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수도원 입회후 사십년이 지났어도, 하루하루 날마다 기도해 왔어도 여전히 초보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배우고 공부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삶만 봐도 언제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기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의미심장합니다.

어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중 열두 사도를 뽑아

사도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개인의 한계를 절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명실공히 ‘안으로는 제자로’, ‘밖으로는 사도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샘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온통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일치의 기도는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은 그대로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들은 자녀다운 삶에, 제자다운 삶에, 사도다운 삶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이 다양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자들이자 사도들의 한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라는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서로 좋아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인 주님께 맞춰감으로 이뤄지는 다양성의 일치요,

이것은 우리 수도공동생활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어 열두 사도를 뽑으신 주님은 함께 내려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 모두를 낫게 하시니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커다란 치유 공동체를 형성된 모습이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주목되는 대목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이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다시피 코린토교회 신자들중 일부는

다양한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고 있음을 봅니다. 

 

교우들간의 송사문제에 이어 불의한 자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우상숭배자와 간음하는 자들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자들, 즉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삶을 잊음으로 자초한 결과가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을 살게 하시고

온갖 더러운 영들을 퇴치해 주시어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미사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6,11). 아멘.

 


9/11(수)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항상 기도하십시오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 하였습니다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감사하면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게 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다시피 코린토교회 신자들중 일부는

다양한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고 있음을 봅니다. 

 

교우들간의 송사문제에 이어 불의한 자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우상숭배자와 간음하는 자들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자들, 즉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의 삶을 잊음으로 자초한 결과가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을 살게 하시고

온갖 더러운 영들을 퇴치해 주시어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미사은총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6,11). 아멘.(이수철 신부)

 

9/11(수)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82일차 기도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게 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11일(수) 18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