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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9일 월요일[(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9일 월요일[(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입당송

시편 119(118),137.124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5-6ㄱㄴ.6ㄷ-7.12(◎ 9ㄴ)
◎ 주님, 당신의 정의로 저를 이끄소서.
○ 당신은 죄악을 좋아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기에, 악인은 당신 앞에 머물지 못하고, 거만한 자들은 당신 눈앞에 나서지 못하나이다. ◎
○ 당신은 나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없애시나이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를, 주님은 역겨워하시나이다. ◎
○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환호하리이다.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 당신이 감싸시니, 그들은 당신 안에서 기뻐하리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참된 믿음과 평화를 주셨으니
저희가 예물을 바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합당히 공경하고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42(41),2-3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 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기어는 대부분 자동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4년 나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누가 미사의 은총을 받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은 회당에서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가르쳐줍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모든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총은 착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영화 ‘신데렐라 맨’(2005)은 대공황 동안 극심한 빈곤에서 복싱 경력을 되찾은 프로 복서

제임스 J. 브래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이미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아 권투 면허를 잃은 브래독의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일용직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돈이 없는 브래독의 사정은 정말 딱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쫓아낸 권투협회에 가서 거지처럼 구걸합니다.

전 코치 조 고울드는 그에게 많은 돈을 기부해줍니다. 

 

어느 날 조가 찾아옵니다. 한 권투선수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권투협회에 브래독을

자신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조는 다시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경기로

승리를 따내고 브래독은 승승장구합니다. 오른손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 막일을 해야 해서

왼손의 파워가 급격하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결승전은 그야말로 드라마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은 하도 무자비하여 링에서

선수 2명을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아내와 코치는 그래도 브래독을 믿어줍니다.

브래독은 상대선수가 다른 선수를 죽도록 패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브래독은 ‘신데렐라 맨’으로 불렸습니다. 일용직 막노동꾼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코치와 그에게 감동하여 다시 기회를 준 권투협회의 힘이 컸습니다.

권투협회는 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구걸까지 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가 부모에게 그런 자비심으로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신데렐라는 다른 언니들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았을까요? 착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학배 안젤로 신부는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장애인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타인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장애인이 자기 동생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시 길에서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아는 척을 안 하고 그냥 지나쳐 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다는 말을 동생이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매는 미사에 오면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레베카도 불쌍한 여행객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은총을 받으신 이유는 그러한 착한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새기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강론

2024년 나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8.연중 제23주일                                                              이사35,4-7ㄴ 야고2,1-5 마르7,31-37

                                                     하느님 중심의 삶

                                 “두려워하지 마라, 열려라, 차별하지 마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지금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는 흥분의 도가니속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3일간 사목방문중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도 열렬한 환대중에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어제 강론처럼 오늘도 교황님의 소식을 알림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구 1천50만명의 파푸아뉴기는 전체 인구의 약 26%가 가톨릭 신자이며,

70%는 개신교를 믿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파푸아뉴기니 곳곳에서 나눈 연설 제목을 소개합니다.

88세 고령이지만 정신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빛나는 희망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감, 친근함, 연민 그리고 부드러움을 지니십시오.”

“용기,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의 증인이 되십시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시오.”

“교회의 선교는 우리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활동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미래를 지닙니다.”

“파푸아뉴기니 가톨릭 신자들은 멜라네시아계(96%) 파푸아인 정신으로 그들의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파푸아뉴기니 어린이들이여, 타오르는 사랑의 빛으로 사십시오.”

“교황님의 방문은 학생들에게는 큰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꼭 10년전 2014년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이 기적처럼 10년후 이맘때쯤 동남아시아 3개국과 

오세아니아의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것입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향력이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고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늘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 즉 신망애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나눕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정서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서에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바위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향과 행복을 노래하며

이들의 희망과 믿음을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며 믿음의 삶을 살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런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살 때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열려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려라의 아람어 “에파타!” 어감도 힘차 좋습니다.

 

닫힘에서 희망의 열림입니다.

닫힌 우리를 열어주시어 희망의 기쁨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닫혀 불통일 때 온갖 죄요 병입니다.

 

마음도, 귀도, 입도 열려야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오늘 복음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실낙원은 복락원이 되고 새로운 창조의 구원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희망의 그때를 노래하는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인 이사야 예언자요, 그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복음의 귀먹고 말못하는 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치유기적을 목격한 이들과 함께 더할 나위없이 놀라서 고백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 구나!”

 

그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매번 되뇌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요 우리들인지,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희망의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차별하지 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하느님 다운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잘 반영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선생님은 여기 좋으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생각을 지닌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을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으며

자발적 가난으로 믿음의 부자가 되는 길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제가 신약성서중 좋아하는 아람어 둘은 오늘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활짝 열어 듣고 말하게 하신

‘에파타’와 또 죽은 소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살리신 ‘탈리타 쿰’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에파타!” 외치며 하늘 향해 활짝 마음을 여시고, 좌절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탈리타 쿰!”하며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길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삶, 하느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희망의 삶,

차별하지 않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랑의 삶”을,

바로 참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이방인을 보살피시네.”(시편146,8-9ㄱ). 아멘.


9/9(월)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80일차 기도

 

1.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 구나!”

그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매번 되뇌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신약성서중 좋아하는 아람어 둘은 오늘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활짝 열어 듣고 말하게 하신

‘에파타’와 또 죽은 소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살리신 ‘탈리타 쿰’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에파타!” 외치며 하늘 향해 활짝 마음을 여시고, 좌절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탈리타 쿰!”하며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수철 신부)


 

9/9(월)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80일차 기도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9일(월) 5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