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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21일 토요일[(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21일 토요일[(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 마태오 사도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입당송

마태 28,19-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대영광송>

본기도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세리 마태오를 복된 사도로 뽑으셨으니
저희가 그의 모범과 전구로 도움을 받아
언제나 하느님을 따르며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모임이 주님을 기리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사도들의 설교로 교회의 믿음을 길러 주셨으니
저희가 복된 마태오를 기억하며 드리는 이 제사를 굽어보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언제나 보살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사도 감사송 2 : 교회의 기초이며 증거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도들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
지상에서 주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표지가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와 영원히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9,13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마태오가 구세주를 집에 모시고 잔치를 열었듯이
오늘 저희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기뻐하오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성 마태오 복음사가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마태 9,9-13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 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

(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0.금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1821-1846)와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3,1-9 로마8,31ㄴ-39 루카9,23-26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순교적 삶”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에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287장 입당성가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퇴장 성가 역시 두분의 작품인 “순교자 찬가” 283장을 부르게 됩니다.

 

오늘 적당한 시간되면 두 성가를 부르면서, 또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순교영성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지만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의무기념으로 지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18-19세기 100여년에 걸친 박해시기 10000여명 순교자들을 낸 것은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명례방 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경신박해(1860년),

병인박해(1866년), 한티 천주교 박해(1868년), 제주도 교난(1901년)등, 무려 1세기 100여년 동안

상상하기도 끔찍한 순교자들의 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물든 때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말그대로 순교자들의 한국천주교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현 상황의 매우 위중하고 심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폭력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도대체 앞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만 해도 심각한데 국내외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란합니다.

길과 희망, 진리와 빛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같습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무엇하나 낙관적 징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라도 순교영성을 새로이 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주님의 전사, 진리의 전사, 평화의 전사, 빛과 생명의 전사”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구체화되며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들처럼 한결같은 내적평화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신뢰와 사랑의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은총의 선물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축복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기일전 용기를 내십시오.

참으로 이런 은총에 힘입어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아 주님 사랑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우리를 사기충천하게 합니다.

새삼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고,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하며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 순교영성을, 백절불굴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종파를 초월하여 예외없이,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진리의 길 주님 하나뿐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길과 희망, 빛과 생명, 진리의 주님을 잃었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잃고 자기를 잃은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좀비’와 ‘헛것’의 유령같은 삶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끝으로 제 평생 좌우명 고백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원은 요란한 구호가 아닌 한곁같은 파스카 삶의 실천으로 성취됩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은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2024년 9월21일 토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1일 토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91일차 기도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21일(토) 10시20분 -

 

성 마태오 복음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