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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22일 주일[(녹) 연중 제25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22일 주일[(녹) 연중 제25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만, 정작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지혜를 주시어, 성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4(53),3-4.5.6과 8(◎ 6ㄴ)
◎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
○ 이방인들이 제게 맞서 일어나고, 포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노리나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안중에도 없나이다. ◎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

제2독서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3,16─4,3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2테살 2,14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진리이신 주님, 세상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교회를 도와주시어, 인간의 욕망으로 급속히 변하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밝히며 그 가르침을 전하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공직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하여 애쓰는 참된 봉사자가 되게 하소서.

3. 버려진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아이들과 몸소 함께하시어, 그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그들이 하루빨리 따뜻한 보살핌 속에 밝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복음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저희를 굽어 살피시어, 주님을 더욱더 믿고 따르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19(118),4-5 참조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또는>
요한 10,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영성체 후 묵상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대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지 맙시다. 큰 사람이나 첫째가 되려고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일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복음: 마르 9,30-37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일

 

<하느님께 '첫째'가 되는 길>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1.토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에페4,1-7.11-13 마태9,9-13

 

                                                             “나를 따라라”

                                                 -중심, 방향, 일치의 공동체-

 

저는 언제나 기상하면 만세칠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가장 좋은 기도, 만세칠창을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시작했으니

1년이 훨씬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후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들여다 본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통해 가르침을 배웁니다.

국제 가톨릭 학생 모임의 회원들을 만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정중에 있는 순례자들로서 주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에로 불림받고 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도 성 마태오가 주님께 불림받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당대 세리라 하면 죄인처럼 사람 취급 못받는 아주 무시당하던 신분이었습니다.

바로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가 그런 신원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후 길을 가시던 길이신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갈망의 사람,

마태오를 첫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그의 과거나 신분이 아닌 그의 내면의 당신을 찾는 순수와 열정, 갈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마태오의 운명적, 축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정관념이 없고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고 실상의 본질을 직시하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런지요? 

 

한두번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당대 제자들이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았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마태오이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또 주님께 부름 받은 세리 마태오는 “혼자”의 삶에서 “더불어”의 제자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께 불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포함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네 제자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참으로 바리사이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일뿐임을

까맣게 모른 무지한 바리사이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복음중의 복음이요 참 명쾌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며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격이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의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의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병없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요,

자비로운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말씀이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은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서로 좋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중심의 주님께 부단히 맞춰가며 각자의 책무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양성과 조화의 일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아름답고 성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교황님은 “미사는 하늘을 향한 고속도로다(Eucharist is the highway to Heaven)”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2024년 9월22일 일요일 [(녹) 연중 제25주일], 되새김 구절

 

1.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2일 일요일 [(녹) 연중 제25주일]. 92일차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22일(일) 10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