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24일 화요일[(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본기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잠언의 말씀입니다.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
○ 당신 규정의 길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기적을 묵상하오리다. ◎
○ 저는 진실의 길을 택하였고, 제 앞에 당신 법규를 세웠나이다. ◎
○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
○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
○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또는>
요한 10,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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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 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루카 8,19-21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3.월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1887-1968) 기념일
잠언3,27-34 루카8,16-18
삶의 지혜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식이 많아서 스승이 아니라 삶의 지혜가 뛰어나 스승입니다.
지식의 선생은 많아도 지혜의 어른이나 스승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추세라 웬만한 답은 스마트폰이 다 해주기에 이젠 지식의 선생도 쓸모없어졌습니다.
이럴수록 삶의 스승이, 지혜의 스승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 사막의 수도자들은 “참으로, 진짜로 살기”를 원했고, 많은 구도자들은 이들의 지혜를 찾아
사막에 갔습니다.
사실 우리 옛 어머니들은 지식은 짧았어도 겸손했고 삶의 지혜는 탁월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감동하고 감탄하는 바 제 어머니입니다. 살아갈수록 자주 생각나는 어머니요
어머니의 지혜입니다.
어머니의 젖만 먹고 큰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도 먹고 컸음을 깨닫습니다.
예전에 이런 "어머니를 그리며" 쓴 자작 고백시 일부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는 모두가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은 참 부자였고 행복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2005.3>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리운 어머니는 제 삶의 교사, 지혜의 교사가 되고 계십니다.
지혜 역시 보고 배웁니다.
지식들은 다 잊혀져도 보고 배운 사랑과 지혜는 영원히 살아 있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부터 이번 주간 제1독서는 지혜서에 해당되는 잠언과 코헬렛을 맛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비의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합리적으로, 책임감있게 살도록
부추기는 상식입니다.
새삼 영성생활도 비상하기 보다는 이런 평범한 상식의 지혜가 기초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런 지혜는 책에서보다는 삶의 체험에서 깨달음을 통해 배웁니다.
‘삶의 책’이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우리가 교회 성인들에게 배우는 바 역시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 때 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부르는 초대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흔히 오상의 비오 신부님으로 유명한 성인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23일 81세로 선종하기 까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 반세기 동안
어떤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을 지니고 사셨고 오상에서는 피가 배어나왔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명이 비오 신부님을 찾은 것도 대부분 고백성사를 보고
영적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언하였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인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 하셨고,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고,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명의 여자와 만명의 남자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합니다.
성인의 삶이 응축된 지혜로운 말씀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중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의 지혜는 이웃사랑에 관한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공연히 이웃과 다투지 마라.”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새삼 이웃사랑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사랑은 ‘지혜의 샘’입니다.
이와 더불어 잠언의 현자는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복을 내리시고 호의를 베풀어 준다 하시며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올곧은 삶을 살며 ‘하느님의 벗’이 된다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컬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등불은 켜서 등경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지혜로운 신자들은 등경위에 등불처럼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하늘 두려운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이며, 이래서 즉각적인, 끊임없는 회개와 고백성사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경청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수행자로서 한결같이 깨어 수행에 전념하는 영적부자로 사는 이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언자(豫言者)와 더불어 현자(賢者)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평생교육을 이뤄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2024년 9월24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고,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명의 여자와 만명의 남자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합니다.
성인의 삶이 응축된 지혜로운 말씀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4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95일차 기도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024년 9월24일(화) 6시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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