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26일 목요일[(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또는>
요한 10,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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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우외환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시련과 아픔의 순간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없었던 일들이 본당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오랜 동안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힘든 중에도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병원에 있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남편은 재활운동하면 된다고 하고, 아들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시련과 고통이 스나미처럼 밀려왔듯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잘 되는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지만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했습니다. 노상강도에게 가방을 빼앗겼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저는 이 시(詩)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제 삶에도 굴곡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만큼의 용기와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푸쉬킨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 말씀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일 백번 천번 곱씹고 되뇌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미 다 버렸다, 다 내려놓았다고 외치지만,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허무한 대상이 있고, 절대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어떤 대상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대상, 뜬 구름 같은 대상에 절대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 보면 큰일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이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 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5.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잠언30,5-9 루카9,1-6
하느님의 나라
“복음선포와 회개, 믿음과 치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 오이다.”(시편119,105)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우리 또한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회개를 통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 일치가 깊어질수록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될 수 있고, 이 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빛이자 길이요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어 표류하고 방황하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바 빛이자 길이요 추구할 바 희망이자 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 평생 화두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시 우리에게도 영원한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가 자주 되뇌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 파견받은 열두 제자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야 할
하느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힘과 권한을 주심을 믿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열두 제자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병자들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목표가 뚜렷하니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유의 삶이 아니라 전적 포기의 존재의 삶,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역시 안주의 삶이 아니라 도상(途上)의 삶, 순례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믿는 이는
모두가 ‘길가는 사람’, 도인(道人)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흘러야, 떠나야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삶도 행복도 자유도 선택입니다.
말그대로의 무소유는 아닐지라도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집착의 초연한 이탈의 가난한 삶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셨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자리 잡고 있는 내 삶의 제자리가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려는 우리에게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공감이 가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회개와 더불어 믿음과 치유의 삶을,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 기쁨과 평화, 감사와 겸손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아멘.
2024년 9월26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조재형 신부)
2.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6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97일차 기도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 2024년 9월26일(목) 21시3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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