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19일 화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승리하는 사람은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으리라.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
○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
○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대세(代洗)’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대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분에게 줍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서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분에게 줍니다. 형제님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세를 위해서 형제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외견상 매우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세례명을 직접 정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중학생 때 세례받았던 딸과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님과 가족들에게 천주교회의 4대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전에 성경을 2번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시간 되면 성경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형제님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는 딸의 사랑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았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위와 세상이 주는 재물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9,1-10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실존의 변화>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먼저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처럼 ‘일어서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얼른 내려오라'고!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8.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묵시1,1-4.5ㄴ;2,1-5ㄱ 루카18,35-43
개안의 여정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119,105)
날마다 등불에 불을 켜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린왕자의 점등인點燈人을 이해합니다.
어린왕자는 예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과 나눴을 때 참 좋아했던 책이었습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그 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어린왕자는 점등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 아저씨, 왜 지금 마악 가로등을 껐어?”
“명령이다. 안녕.”
“점등인이 대답했다.
“명령이란 무어야?”
“가로등을 끄라는 명령이다. 안녕.”
“그런데 왜 다시 가로등을 켰어?”
“명령이라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데.”
하고 어린왕자가 말했다.
“알아듣고 어쩌고 할 것이 못돼. 명령이야, 안녕.”-
명령에 복종하듯 쓰는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이유가 필요없습니다.
진리이신 주님 명령에 복종할뿐입니다. 얼마전 새롭게 읽은 한용운의 시 ‘복종’이 생각납니다.
순명, 순종 말마디보다 요즘 부쩍 좋아진 복종이란 말마디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라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명령에 기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소복음서라할 만큼 내용도, 상징도 풍부합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는 늘 새롭습니다.
강론 제목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날로 눈이 열려가는 눈밝은 개안의 여정인 우리의 영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점차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중에 날로 자비롭고 지혜롭고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다.
개안하면 떠오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아름다운 그림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무명의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바로 눈이 가려 방향을 잡지 못한
가련한 인간 존재를, 또 길가에 앉아서 길이신 주님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은 도인道人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복된 운명의 도인들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닫혀있지만 영적 갈망에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 깨어 있는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말마디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르짖습니다. 잠자코 있으리는 꾸짖음에 아랑곳 없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마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과의 문답은 불가의 선문답을, 또 사막교부를 찾았던 제자와의 문답을 연상케 합니다.
진실하고 간절하면 말도 글도 행동도 짧고 순수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단도직입적 질문에,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문득 법정의 스승이었던 효봉선사가 그의 스승 석두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경우가 생각납니다.
정처없이 떠돌던 효봉이 석두스님 소식을 듣고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을 찾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가?”
스님의 물음에
“이렇게 왔습니다.”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돌고 앉습니다.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이라 법명을 내립니다.
진리를 찾는 열망이 간절했기에 이런 동작으로 답했고 이에 화답한 석두 큰 스님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걸인에 대한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전제되는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영적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다시 보게된 눈먼 걸인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이를 본 군중도 고무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이들의 믿음도 한층 고양되었을 것입니다.
새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진리이신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찬미드리라 있는 입이며,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 이상 눈멀지도 않았고, 더 이상 걸인도 아니고,
더 이상 길위에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만나 길의 방향을 잡았고 주님과 함께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삶의 방향, 삶의 목표,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한 인생입니다.
말그대로 개안의 여정이요 그의 마음의 눈은 날로 밝아지고 맑아졌을 것이며
영적시야는 날로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개안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물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 에페소 교회에 주는 말씀이 흡사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듯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하여라.”
초발심을 회복하여 주님 사랑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은총이 주님 찾는 열정에 불을 붙여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아멘.
11/19(화)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얼른 내려오라'고!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단도직입적 질문에,
“주님, 제가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제대로 잘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이수철 신부)
11/19(화)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제 151-21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의 말·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6)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주님,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19일(화) 7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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