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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1월 18일 월요일[(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1월 18일 월요일[(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입당송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의 시작입니다.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묵시 2,7ㄴ 참조)
◎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리라.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8,1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3(72),28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주일 미사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형제님과 자매님이 면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사목회가 있었지만, 저를 찾아온 부부와 면담했습니다. 10년 전에 달라스 성당에서 아들과 함께 세례받았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로 이사 갔다가 다시 달라스로 왔다고 합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성당을 멀리하였다고 합니다.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아서 벌 받았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염치가 없이 어찌 그런 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부님께라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은 형제님이 성당에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형제님이 성당에 다니지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청하면 기꺼이 장례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슬픔이 가득했던 부부는 위로받았고, 아들을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모든 성인 대축일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의 전구 함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루카 18,35-43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영혼의 눈을 뜨는 일>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7.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다니12,1-3 히브10,11-14.18 마르13,24-32

 

                                                      가난을 사랑합시다

                                                <가난하나 존엄한 품위의 삶>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정한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아마 오늘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실 것이며 점심식사에는 매해 하는 것처럼 

올해도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1천여명을 초청해 함께 식사할 것입니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교황이야 말로 현대판 예언자입니다.

교황의 엊그제 예술가들에게, 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도 멋졌습니다.

 

“너희는 하느님 창조활동의 협력자들이다.”

“삶에서 결코 물러나지 말고, 계속 꿈을 키워라.”

“너희 도서관이 만남의 오아시스가 되도록 하라.”

 

올해 교황 담화문의 주제 성구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집회21,5참조)

바로 이 담화문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인

2024년6월13일에 발표했습니다.

가난을 사랑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이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주님의 참행복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루카4,18ㄴ) 역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맨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황의 올해 담화문중 감동적인 부분을 소개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구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겸손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겸손한 이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덕이 있으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지가지없는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힘을 얻고 그분께 모든 신뢰를 둡니다.

기도의 진정성은 애덕 안에서 확인됩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인간의 본질은 미사시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한 가난한 빈손의 행렬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늘 대할 때 마다 감동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흡사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앞에 줄서있는 가난한 거지들같습니다.

담화문에서 인용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의 유엔총회에서의 연설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일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을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저는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가난한 이에게 그 사랑을 전해 줍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여러분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알아봅니다.”

 

끝부분에는 베네딕도 요셉 라브로 성인에 대한 내용도 각별한 감동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로마로 순례를 온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가난한 사람들 가운에서 가난하게 지내면서

성체앞에 기도하고 묵주기도와 성무일도를 바치며 신약성경과 준주성범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방랑자로서 정주하는 곳 없이 콜로세움 폐허의 한 귀퉁이에서 잤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도 긴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바뇌에서 발현하시어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라는 잊지 못할 메시지를 남겨주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이 여정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을 사랑합시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정결을 사랑하라, 단식을 사랑하라,

거룩한 독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수행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겸손을 기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선비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된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을 대변하는

이 말마디처럼 존엄한 품위의 가난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삶이 참 그립습니다.

 

영정조 시대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며 오히려 능가한다는, 또 겸재 정선을 보완하며 능가한다는,

평생 가난속에 살았던 시서화詩書畵의 대가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이 아내를 잃고 바친 제문이

너무 아름다워 길다싶지만 전문을 소개합니다.

 

“아아! 내가 세상과 맞지 않아

궁하게 지내기로 맹세했건만

자질이 순수하지 못해

도道에서 멀었지요.

숙인淑人은 나의 아내이면서

나의 사우師友이기도 했지요.

나의 어리석음 깨쳐주고 슬픔을 위로했거늘

그 낯빛은 순하고 말씨는 순후했지요.

이 때문에 내가 치욕을 면할 수 있었거늘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숙인이 부지런히 힘쓴 덕분에

나는 집안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굶주려도 책을 팔지 않았고

추워도 꽃나무를 때지 않았지요.

시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나의 오활(迂闊;사리에 어둠)함을 열어 주었지요.

이따금 내가 산수에 노닐 때면

기분이 좋아 글이 번드레해졌지요.

돌아와 내가 글귀를 들려주면

문득 충고하며

말이 화려하면

도道가 높지 못함을 일깨워 줬지요.

규중의 즐거움이

옛 도에 있었으니

나의 두엇 단아한 벗은

우리의 금슬을 익히 알았지요.

아아! 여자가 훌륭한 건

크게 슬퍼할 일이외다.

지아비가 슬기롭지 못하니

누가 그 훌륭한 행실을 자세히 전하겠습니까.

숙인은 정숙하고, 굳세고, 따뜻하고, 은혜로워

타고난 본성을 잘 지켰으며

사리에 맞는 온갖 말들은

고인古人의 말을 끌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정성스레 내게 한 충고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가려져 버릴 테지만

차마 사사로움 꾸밀 수 없어

당신의 일을 적지 않습니다.

아아! 농사짓기는 갈산葛山이 좋고

낚시하기는 구담龜潭이 좋거늘

거기서 살자던 당신과의 약속

그만 무덤에 묻고 말았구려

머리는 희어지고 마음은 끊어질 듯해

남은 생을 슬퍼합니다.

아아! 내가 영결하는 말을 하니

그대는 길이 슬퍼하지 마오.

말을 가려 하고 병을 조심하며

사귐을 끊고 화려함을 거두어

끝내 도道에 돌아가

경전으로 자식을 가르침으로써

그대의 마음을 따르겠다는

내 진실한 마음을 고합니다.

아아, 슬프외다!”<능호과 이인상 서화평석 2서예,648-651;박희병>

 

제 강론에 이렇게 긴 글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평생 극심한 가난중에도 끝까지 고귀한 품위를 지켰던 지어미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

그 지아비의 제문을 고스란히 인용했습니다.

이인상이 맘놓고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의 높은 덕임을 깨닫습니다. 

 

도道는 말씀이요 진리요, 도를 통해 하느님은 옛 조상들을 이끄셨습니다.

도에 충실했던 옛 선인들, 그대로 다니엘 예언자의 말씀에 해당된다 믿습니다.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바로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빛났던 성인, 성녀, 군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가난에도 불구하고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말과 같은 혼란이요 작금의 현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모두이자 길이요 희망이신, 구원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삼 떠오르는 “202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 성서 모토, 요한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그러니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난중에도 우리 모두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11/18(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조재형 신부)

 

2.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난중에도 우리 모두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이수철 신부)

 

11/18(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 150-20 기도(침묵 & 식후운동)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18일(월) 5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