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13일(금)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73) 유언 매형 내외에게 집에서 쫓겨난 득구 부친의 영정족자 들고 암자 찾아가는데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사는 데 아무 불편 없는 유 진사는 요즘 태산 같은 걱정이 생겼다. 시집간 외동딸이 석녀라고 2년도 안돼 시집에서 쫓겨나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돌아와 제 방에 처박혀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허구한 날 얼굴에 수심이 잔뜩 덮인 딸을 보는 것은 유 진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백형의 장례를 치르느라 먼 길을 가 삼우제까지 지내고 열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딸의 동정을 살폈더니 딸이 먼저 사랑방으로 와 큰집 초상 치른 일을 물었다.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딸의 수심이 걷힌 기쁨이 백형의 저승행 슬픔을 지우고도 한참 남았다. 중복이 가까운 어느 날 밤, 마실 갔던 유 진사가 배탈이 나 일찍 집으로 왔더니 뒤꼍 우물가에서 총각집사가 윗도리를 훌렁 벗고 엉덩이를 치켜든 채 땅을 짚고 엎드렸는데, 유 진사 딸이 웃으며 등물을 퍼붓고 있었다. 유 진사는 몰래 뒷간에 갔다가 다시 집을 나갔다. 유 진사는 모른 척했다. 오륙년 데리고 있어보니 집사는 경우 밝고 영특했다. 시집에서 쫓겨난 무남독녀에 대한 걱정을 한결 덜고 나니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내가 죽으면 우리 집안 대(代)가 끊기는구나. 유 진사가 고갯마루 묵집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나이 지긋한 할매가 청상과부를 데리고 묵도 쑤고 탁배기도 걸렀다. 유 진사가 혼자 갈라치면 할매와 대작을 했다. 서로 신세타령을 하느라 해 지는 것도 몰랐다. 이제 마흔 고개에 올라선 유 진사가 대가 끊기는 걸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다 못한 할매가 어느 날 부엌데기 청상과부를 설득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겨우 젖을 뗀 아들과 묵집에서 주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세식구가 살아가려니 죽을 지경인데, 설상가상 아들을 돌봐주는 친정어머니가 병석에 누웠는데도 약 한첩 못 쓰고 있었다. 계속 고개를 젓던 청상과부가 돈이 목을 조여오자 마침내 두손을 들고 말았다. 할매가 자리를 피해주면 유 진사가 청상과부의 옷고름을 풀었다. 한해가 지났다. 유 진사가 젖도 안 뗀 아들을 안고 집으로 왔다. 다행히 유 진사의 딸도 딸을 낳아 한쪽 젖은 제 딸에게 물리고 다른 한쪽 젖은 배다른 남동생에게 물렸다. 유 진사 딸은 석녀가 아니고 신랑이 씨 없는 수박이었다. 어느 해인가, 유 진사의 아들이 젖을 떼고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공부할 때 유 진사가 쇠뿔에 받혀 급살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열두해가 흘러 유 진사 아들 득구는 열일곱살이 됐다. 유 진사의 딸은 아들딸 넷을 거느리고 유 진사 생전의 집사였던 신랑, 오 서방과 알뜰살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사랑방에 술상을 차려놓고 오 서방이 득구를 불렀다. “매형, 불렀어요?” “그래, 얘기 좀 하자.” 결론은 논문서 다섯개를 내놓으며 그걸 가지고 이집을 나가 자립하라는 것이었다. 안방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 “누님도 같은 생각이세요?” 묻자 누이는 눈물을 떨구며 대답을 못했다. 이튿날 득구는 사랑방에 걸려 있는 유 진사 영정족자를 돌돌 말아 단봇짐에 넣고 지필묵과 잡동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득구가 찾아간 곳은 산속 조그만 암자 무실암이다. 선친의 곡차 친구였고 가끔 탁발하러 오는 송하스님의 암자다. 스님에게 삼배를 올린 후 논문서 다섯개를 내놓으며 “스님, 이걸 팔아 쓰러져가는 암자를 보수합시다. 소인 여기 머물도록 행자로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득구는 요사채에 방 하나를 잡고 맨 먼저 유 진사의 영정족자를 걸고 그 앞에 엎드려 흐느꼈다. 어느 날 요사채 득구 방에 들어온 스님이 유 진사 영정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그걸 벗겨 가지고 나갔다. 며칠 후 득구의 매형 오 서방한테 사또로부터 호출장이 날아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송사가 벌어진 것이다. 원고는 득구였다. 득구는 자신도 모르게 송사에 휘말렸다. 동헌 마당에 원고 득구와 피고 오 서방이 마주섰다. “으흠 으흠. 어찌하여 아들을 쫓아내고 네가 유 진사의 재산과 집을 차지하였는고?” 사또가 묻자 오 서방이 서슴없이 “생전에 유 진사께서 시집에서 쫓겨온 외동따님을 제게 맡기며 어린 처남이 열일곱이 될 때까지 잘 돌봐달라 하셨습니다. 처남은 제 처의 젖을 빨아먹고 자랐고, 이날까지 유 진사의 유지를 받들어 훌륭한 청년으로 키웠습니다”하고 답했다. * * * * * 그때 송하 스님이 나타나 “유 진사는 유서를 남겼습니다”라며 유 진사의 영정족자를 펼쳤다. “유 진사의 오른손 직지가 가리키는 곳은 족자봉입니다. 이걸 뜯어보겠습니다.” 스님이 족자봉을 뜯어내자 동그랗게 감긴 종이가 나왔다. “득구는 열일곱이 되거든 장가를 가고, 누이는 논 서른마지기를 가지고 오 서방과 세간을 나도록 하라.” 송사는 그걸로 끝났다. |
작은 소중함 옷을 짓는 데는 작은 바늘이 필요한 것이니 비록 기다란 창이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비를 피할 때에도 작은 우산 하나면 충분한 것이니 하늘이 드넓다 하더라도 따로 큰 것을 구할 수고가 필요없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 그 타고난 바와 생김 생김에 따라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되는 것이다. - 원효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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