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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글·자녀교육·시사

[241211 글/시]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371) 오유지족/사람의 향기가 나는 시간(박성철)

2024년 12월11일(수)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371) 오유지족

주 대인의 고리짝 운반 맡은 오 생원
괴한이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데…


황포돛배가 나루터에 닿았다. 지게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옥색 두루마기에 챙 넓은 갓을 쓰고 강바람에 수염을 휘날리며 한발을 뱃전에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화주, 주 대인이 덩치 큰 지게꾼을 불러올렸다. “이 고리짝을 지고 오현을 넘을 수 있겠나?”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 여기서 소인보다 힘센 사람은 없습니다요.” 지게꾼 오 생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고리짝을 들어보던 오 생원이 깜짝 놀랐다. 광목 보자기에 싸인 고리짝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나으리, 납덩어리가 들었습니까. 왜 이리 무거워요?” 낑낑거리며 배에서 내려 나루터 바닥에 고리짝을 놓고 큰 숨을 토했다. 고리짝을 지게에 올릴 땐 다른 지게꾼의 힘을 빌려야 했다.


‘꺼∼억 꺼∼억’ 까마귀 떼가 안 그래도 음침한 하늘을 갑자기 시커멓게 덮었다. 일생일대의 큰 거래를 앞두고 불길한 생각이 덮쳐와 주 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싯돌로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온통 새까만 옷으로 몸을 휘감고선, 함께 배를 타고 오며 계속 주 대인의 동정을 살피던 기분 나쁜 녀석도 하선해 힐끗 주 대인을 째려보고 성큼성큼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하선한 다른 승객들도 우르르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 대인은 시원한 평상에 앉지 않았다. 안마루에 벽을 등지고 앉았다. 등에 칼을 맞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자위책이다. 대여섯놈이 앞에서 달려드는 건 품속의 단검을 빼 들면 너끈하게 모두 눕힐 수 있지만 등 뒤 불의의 습격은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는 한 속수무책이다. 주 대인은 너비아니에 청주 한잔을 마시고 오 생원은 마당 끝자락 멍석 위에 앉아 국밥에 탁배기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를 앞둔 기나긴 여름날이라 아직도 먹구름 뒤에 숨은 해는 중천에 있었다. 주 대인이 앞서고 오 생원이 고리짝을 지고 주막을 나섰다. 오현 고갯길 초입부터 또다시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었다. 고갯마루에 올랐다. 땀에 흠뻑 젖은 오 생원이 옹달샘 바위 옆에 지게를 세웠다. 벌컥벌컥 샘물을 마시고 퍼질러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검은 옷을 입은 기분 나쁜 놈이 오 생원에게 속삭였다. “자네가 짊어지고 온 저 고리짝 속에는 경면주사(부적과 염주 등을 만드는 붉은색 광물)가 가득해. 주 대인을 죽이면 경면주사는 자네가 가져가 평생 이 고생 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고, 나와 내 형제들은 살이 뒤룩뒤룩 찐 주 대인을 뜯어먹을 수 있잖아.”


“안돼!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지금 내 생활에 족해.” “병신 같은 놈.” 검은 옷 괴한의 날쌘 발차기에 오 생원의 아구창이 돌아가 바위 아래 처박혔다. 풀숲에서 큰 걸 보고 나온 주 대인이 품속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검은 옷 괴한은 주 대인의 머리 위를 획획 날며 발차기를 노리고 하늘을 덮은 까마귀들은 부리와 발톱으로 주 대인을 쪼아댔다.


주 대인의 단검 솜씨도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너무 빨라 단검은 보이지 않고 검붉은 핏줄기만 허공을 물들였다. 검은 옷 괴한이 피투성이가 돼 땅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더니 까마귀로 변했다. 주 대인의 단검에 널브러진 까마귀들은 피투성이 사람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이놈은 살인을 밥 먹듯이 했던 강도였고, 이놈은 유부녀를 겁탈하고 항거하던 여인들을 수없이 죽인 치한이었고, 이놈은 살인청부업자였고….” 아구창을 한손으로 받쳐 든 오 생원이 깨어났다. 피 묻은 단검을 물로 씻어 다시 품속에 넣은 주 대인이 오 생원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 생원, 훌륭하오.” “뭐가요?” “까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잖소.” “당연하지요. 오유지족! 소인은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숨을 고른 오 생원이 말을 이어갔다.


“지게꾼 생활은 힘이 들지만 마음은 한없이 편해요. 튼튼한 다리를 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품을 받아 집으로 가면 보글보글 된장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마누라가 반기고, 조끼 주머니에서 엿을 꺼내서 내 새끼들에게 나눠 주면 웃음꽃이 피지요.” 오 생원이 바위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자 주 대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고향에 처박아둔, 십여년째 소식도 듣지 못한 마누라가 보고 싶어졌다. 늙은 어머니는? 아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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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에 퍼질러 앉은 주 대인이 갑자기 꿇어앉곤 오 생원에게 큰절을 하자 깜짝 놀란 오 생원이 주 대인을 일으켜 세웠다. “으으으흑, 당신은 부처요. 나의 죄를 사해주시오.” 주 대인이 갑자기 고리짝을 굴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고리짝이 떨어지며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가짜 경면주사가 흩어지고 또 부딪힐 때는 밑에 깔렸던 아편이 허공에 날렸고 부질없는 주 대인의 욕망도 산산이 부서졌다. 품속의 단검도 절벽 아래로 던졌다. 주 대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 오 생원에게 듬뿍 내주고 일어서서 합장을 한 후,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유지족’을 중얼거리며.

 

 

사람의 향기가 나는 시간




어느 날 시계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계 안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다.
성급한 사람, 무덤덤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
그리고 느긋한 사람.


" 당신은 어느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쫓기듯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틀에서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그것을 즐기고 이용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시계 바늘이 돌아가듯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고요의 시간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음미할 시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를 음미해 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시간도 가져 보고
힘들어 하는 친구를 위해
편지 한 장을 쓰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소중한 당신의 인생에
이렇듯 사람의 향기가 나는 시간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 박 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