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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글·자녀교육·시사

[241214 글/시]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74) 더위 먹은 옹고집/작은 이야기-엄상익

2024년 12월14일(토)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74) 더위 먹은 옹고집

황 의원, 평상에 앉아 부채질 하는 중에
화살 맞은 장끼 한마리가 툭 떨어지는데

말복을 앞둔 푹푹 찌는 어느 날, 안마당 감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던 황 의원이 화들짝 놀랐다. ‘푸드덕’ 장끼 한마리가 화살에 꽂힌 채 안마당에 떨어지더니 평상 밑으로 들어가 처박힌 것이다. 황 의원이 얼른 누워 코를 골며 자는 척했다. ‘요즘 밥맛이 없어 죽겠는데 조놈을 볶음해서….’

사냥꾼 지 서방이 들어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더니 낮잠에 빠진 황 의원 곁으로 와 평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지 서방이 강아지풀로 황 의원 코를 간질이자 자는 척하던 황 의원이 “에취∼” 재채기하며 일어나 “이게 누구야?”하며 짐짓 놀란 척했다. 
“어르신. 화살 맞은 장끼 한마리 못 보셨어요?”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시치미를 딱 떼는데 ‘푸드덕’ 평상 밑 장끼가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말았다. 지 서방이 엎드려 장끼를 꺼냈다. 황 의원이 “잠깐!” 손으로 장끼를 움켜잡고 “우리 집에 떨어진 것은 내 것이네!” 하며 낚아챘다. 
“어르신. 이 화살을 보세요. 장끼에 꽂힌 화살과 여기 화살통의 화살이 똑같잖아요!” “으흠 으흠” 헛기침 한 황 의원 한다는 말 좀 보소. “이 화살, 자네가 만든건가 장터 궁도집에서 산 건가?”

“궁도집에서 산 거지요!” “거봐. 그것이 자네가 쓴 화살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말이야.” “나 미치겠네.” 사냥꾼 지 서방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내가 자네한테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 바치고, 얼마나 많은 사냥감을 사줬나. 그랬으면 일부러라도 장끼 한마리를 선물해도 될 터인데 우리 집에 떨어진 장끼 한마리를 꼭 찾아가야 되겠다 그 말이지!?” 
“황 의원님, 저야말로 황 의원님께 갖다 바친 돈이 산더미 같은데, 까진 무릎에 인진쑥진 발라주고도 돈을 받았잖아요. 장끼를 돌려주든지, 열다섯냥 내놓든지 택일하세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작년 겨울 자네한테 거금을 주고 산 웅담이 실은 산돼지 쓸개였지?!”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영감이 생사람 잡네.” “웅담이라고 넣어 지은 약재가 도대체 약효가 나타나지 않아 멱살을 잡히고 토해낸 돈이 모두 얼마인지 알아, 이눔아!” 
“야 이놈의 돌팔이 영감탱이야. 내 부러진 다리를 접골한다고 우리 집 기둥을 빼가고도 이것 봐라. 나는 절름발이가 되었잖아!” 삼복더위에 둘이서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 멱살을 잡아 흔들다가 멱살을 풀고 평상 양쪽 귀퉁이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황 의원이 말했다. “삼월아, 냉수 한사발 떠오너라.” 삼월이가 우물에서 길어온 냉수 한사발을 벌컥벌컥 한숨에 마셔버린 황 의원이 “한사발 더 떠오너라” 해서 또 한사발 떠오자 “저눔아 줘라” 하고 말했다. 
지 서방이 냉수를 받아 들고 황 의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숨 돌린 두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물 한사발 얻어 마셨다고 장끼를 넘겨줄 지 서방이 아니다.

황 의원이 침묵을 깼다. “이렇게 승부를 가리세. 내가 자네 뺨 세대를 갈기고 그다음 자네가 내 뺨 세대를 때리게.” 지 서방은 어이가 없었다. “진담이세요?” “내가 시방 자네하고 농담할 땐가?” “좋습니다. 먼저 하세요.” 지 서방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퍽’ 이를 악물고 휘두른 황 의원의 주먹이 예상보다 매서웠다. ‘퍽’ ‘퍽’ 연이은 두번의 주먹에 지 서방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뱉어낸 피 속에서 이가 나왔다. 
삼월이가 또 물 한사발을 떠왔다. “이번에는 내가 때릴 차례요.” 지 서방이 어금니를 물었다. 황 의원이 빙그레 웃으며 “내가 졌네” 하며 엽전 열다섯냥을 내놓았다.

지 서방이 황 의원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한테 장끼를 팔 생각이 추호도 없어!” 왼손으로 황 의원의 멱살을 잡자 오른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살기가 배었다. 지 서방도 깨달았다. 한방에 영감탱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침내 황 의원과 지 서방이 동헌마당 사또 앞에 섰다. 사또가 자초지종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 “끌끌끌” 혀를 차더니 “여봐라 저 밴댕이 소갈머리 두놈이 더위를 먹었나 보다. 곤장 열대씩으로 정신 차리게 하고 장끼는 황 의원이 가져가고, 황 의원은 이 빠진 지 서방에게 백냥을 지불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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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고집 두사람은 곤장 열대씩 맞고 혼자 걸을 수 없어 서로 부축해서 어기적거리며 동헌을 나왔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려다 냇가의 주막에 들어갔다. 말없이 찬 탁배기를 벌컥벌컥 마시고 서로 손잡고 황 의원 집으로 갔다. 
“괜찮으세요?” 지 서방이 묻자 황 의원이 인진쑥진 고약을 내밀며 바지를 까고 곤장으로 터진 엉덩이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지 서방이 바지를 까 내리자 황 의원이 고약을 발랐다. 두사람의 모습을 보며 마루 밑에 있던 황구가 나와 불알을 핥고 집안의 여자들은 부엌에서 킬킬거렸다.

 

인제군 갑둔리 비밀의 정원

♡작은 이야기
      / 엄상익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수평선 저쪽의 어둠 속에서 신비한 색조의 붉은 기운이 퍼지고 있다. 새벽바다에서 생명의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아이패드키고 음악 중에서 ‘해피 크리스마스 재즈’를 선택했다. 경쾌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방안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모니터 위에 아름다운 화면이 떠오른다. 커피 위에 하얀 크림이 올려진 파란 머그컵이 보인다. 컵의 표면에 빨간 옷을 입은 산타가 활짝 웃고 있다. 소리 없이 눈이 점점이 내려오고 있다. 이른 아침 나만의 공간에서 즐기는 작고 소소한 행복이다. 

스마트 폰의 신문 앱을 열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본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걸 두고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불타는 뉴스에서 나오는 연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카톡에서 읽어달라고 하는 가녀린 신호가 떠올라 있다. 친구가 보내준 나태주 시인의 시였다. 팔순의 시인이 이렇게 속삭였다.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던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지나간 밤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예요.’

시인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맑은 샘물이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문득 세월 저쪽에 있던 나뭇잎 같은 작은 이야기 하나가 시간의 강물을 타고 내게 흘러들었다. 

팔월의 뙤약볕이 쏟아지던 날 광나루의 다리 위에서 걸어가는 세 명의 까까머리 소년이 있었다.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놀기 위해 무거운 배낭들을 지고 있었다. 그중 제일 영리한 아이가 다른 두 소년에게 제안을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오십미터가량 짐을 혼자 다 지고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장격인 그 아이의 말대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상했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대장이 졌다. 결국 대장이 무거운 짐을 지고 긴 다리를 다 건넜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우리의 대장은 짐을 들어주느라고 헌신도 했지만 영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깨우친 것을 둔한 내게 알려주었다. 친구지만 그는 나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중학교 시절 그는 미국에 있는 여자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내게 보여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나중에 이 아이와 결혼해서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사를 할 꺼야.”

나는 선교사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둔한 나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이 땅에서 개고생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대장인 그 친구는 이런 비밀을 알려주었다.

“고등고시라는 게 있대. 거기에 합격하면 한큐 잡는 거래”

“한 큐가 뭔데?”

“하여튼 남들이 그래 나도 몰라. 그런데 너같이 글씨를 못쓰면 합격하기가 힘들 거야.”

그는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고 종내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은 고시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선교사도 천국 고시를 준비하느라고 꽤나 고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합격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검정 교복을 입고 종로거리를 걸어다니던 까까머리 소년들이 이제는 듬성듬성한 백 발에 구부정한 어깨로 지하철역계단을 내려가는 노인이 됐다. 오늘 아침 갑자기 대장인 그에게 큰 죄를 졌다는 미안한 생각이 마음속으로 쳐들어 왔다. 뙤약볕 아래서 광나루의 다리를 걸을 때 그가 가위바위보에서 졌어도 같이 짐을 들고 갔어야 했다. 그게 친군데. 참 미련하고 인정 머리없는 나였다. 그가 나를 계속 친구로 받아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며칠 전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년쯤 귀국하면 보자고 했다. 나는 오늘 아침 쓴 이 글을 그에게 카톡으로 보내야겠다. 그때 정말 잘못했다는 걸 노인이 된 지금에야 깨달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인제군 갑둔리 비밀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