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5일(일)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390) 백 처사 부인 잃고 혼자 지내던 백 처사 어느 과부와 혼담이 오가는데 밀양의 선비촌, 류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학식도 높아 그의 사랑방엔 언제나 오가는 선비들로 넘쳐난다. 어느 날 허우대는 삐쩍 말랐으나 이목구비가 반듯한 백면서생이 들어왔다. 류 진사와 의례적인 통성명을 하고 사랑방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선비들이 술 한잔씩 마시고 저마다 글 자랑을 했다.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한 선비가 운을 뗐는데 대구(對句)를 이을 사람이 없다. 모두가 한숨만 쉬고 있는데 류 진사가 말했다. “백 처사께서 한 구절 이어주시지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그를 바라보자 모기 소리만 하게 읊었다.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언제나 한결같이 좋은 시절)인 줄 압니다.” 이 구절은 선시의 한 대목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돌아앉아 술잔을 비웠다. 사십 줄에 막 접어든 백 처사는 막히는 게 없었다. 특히 주역(周易)을 논할 때면 다른 선비들은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해가 기울어 사랑방을 가득 채웠던 문객들이 일어설 때 류 진사는 백 처사의 두루마기를 잡았다. 류 진사가 백 처사를 유심히 보니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짓달인데 홑두루마기에 동정은 목에 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저녁 겸상을 물린 뒤 둘이서 또 술잔을 기울이며 류 진사가 조심스럽게 백 처사의 신상을 물어봤다. “백년해로하자던 집사람이 시름시름 앓더니 작년 봄에 속절없이 혼자서 이승을 하직하지 뭡니까.” 백 처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마음 둘 데가 없어 정처 없이 이렇게 떠돌아다닙니다.” 백 처사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뚜렷이 갈 곳이 없으시면 소인의 우거에 유하시면 어떨는지요.” 류 진사는 우물 옆 별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백 처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렇게 두해가 지났다. 류 진사는 가끔씩 백 처사를 데리고 산마루 묵집에 갔다. 묵도 팔고 동동주도 파는 이 집 주모는 요즘 선비촌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딱한 처지다. 술 팔고 묵 파는 건 뒷전이고 알돈을 챙기는 건 해웃값이다. 선비촌 남정네치고 묵집 주모 치마 한번 벗기지 않은 선비가 없어 마을 부인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느 날 선비촌 오 과부가 묵집에 찾아왔다. 오 과부는 신랑이 없어 묵집 주모와 척질 일이 없었다. “미친년들이 제 신랑 단속을 어떻게 했길래 남자를 겉돌게 만들어놓고 애꿎은 동생한테 와서 행패야!” 동네 모든 여자들이 돌을 던지는데 오 과부는 주모를 편들고 나섰으니 형님 동생 하며 술잔을 부딪혔다. 오 과부가 술 한잔을 마시더니 얼굴이 불콰해져 말했다. “내가 동생한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세요, 형님.” 주모가 바짝 다가앉았다. 오 과부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류 진사가 내게 중매를 섰지 뭔가.” 주모가 놀라 물었다. “신랑은요?” 긴 침묵 끝에 오 과부가 말했다. “류 진사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백 처사야.” “아, 그 백 처사. 사람이 점잖던데요.” “내가 남은 인생, 이렇게 초라한 과부로 늙어 죽을 수는 없는 일이고, 류 진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 내 맘도 기우는데 걱정이 하나 있지 뭔가.” “형님, 무슨 걱정이요?” “두어달 전에 친정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글쎄 과부 친구 하나가 점잖은 훈장님과 재혼을 했는데 손마디가 길쭉한 백면서생이 밤이 되어도 내 친구 과부를 돌같이 본다네. 하기야 그게 뭐 그리 중한가마는 살아가다가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나면 어떻게 화해를 하겠는가?!” 한참 뜸을 들이던 오 과부가 주모에게 부탁을 했다. “자네가 하룻밤 백 처사를 시험해볼 수 없겠는가?” 주모가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형님,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주모도 요즘 해웃값 장사를 자제했더니 온몸이 찌뿌둥하던 참. 마누라 없는 백 처사는 안성맞춤이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밤, 류 진사와 백 처사가 묵집에 왔을 때 주모가 류 진사에게 귀띔을 했다. 둘 다 술이 잔뜩 취하자 류 진사가 통시에 가는 척 혼자서 집으로 가버렸다. 한숨 푹 잔 백 처사가 사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주모가 들고 온 찬 꿀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그날 밤 오래 굶었던 주모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신기의 방중술에 세번을 기절하고 동창이 밝을 때 또 한번 기절했다. 오 과부가 아침 수저를 놓자마자 득달같이 묵집으로 올라왔다. “형님, 제가 먼저 시험하기를 잘했지요. 형님 신세 망칠 뻔했어요! 손가락만 기다란 게 고자예요, 고자!” 오 과부의 혼담은 이렇게 박살이 났다. 며칠 후 백 처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나서 제천 왈패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왈패 왕초의 첩을 건드린 천하의 오입쟁이 파락호 백 처사는 * * * * * 삼년째 도망 다니는 신세다.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391) 남한산성 류청이와 야반도주한 세록이 방세 위해 남한산성 향하는데 류 대감의 깊은 한숨에 문풍지가 떨렸다. 재작년 봄에 시집간 딸 류청이가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초당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지내는 게 가슴 아파 류 대감은 애꿎은 안동소주만 목구멍 안으로 쏟아 넣고 있었다. 눈이 펄펄 내려 마당에 솜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다. 열여덟살 집사 박세록이가 애들처럼 안마당에서 눈덩이를 굴리더니 날이 저물자 초당 앞에 몸통과 머리통을 올려두고 손을 털었다. 이튿날 아침, 세록이가 류 대감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말했다. “대감마님, 혹시 제가 어제 저녁에 만들어놓은 눈사람에 눈·코·입을 붙이셨습니까요?” 류 대감이 눈을 비비며 “아니”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초당의 류청 아씨가 붙인게 틀림없습니다” 하고 세록이가 대꾸했다. 세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류 대감이 벌떡 일어나 들창문을 열자 아침 햇살을 받아 백옥 같은 눈사람에 밀짚모자를 씌어주며 류청 아씨가 계속 미소를 흘렸다. 류 대감은 세록이의 두손을 잡으며 “네가 우리 청이를 살리고 나를 살리는구나” 하고는 빈속에 소주 한잔을 마시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난해 세록이가 초당 앞에 가져다 심은 홍매가 입춘이 지나자 새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설중매(雪中梅), 새빨간 홍매화 위에 눈이 내렸다. 류청이는 방문을 열고 설중매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봄이 가고 여름도 가고 가을이 왔다. 풀벌레 울어대는 밤에 류 대감은 술상을 가운데 두고 세록이와 마주 앉았다. “내 술 한잔 받게.” 세록이가 돌아앉아 술잔을 비웠다. 이튿날 새벽,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골목길을 두사람이 빠져나가 첫 배를 타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외딴 경안천 냇가 아담한 집에 단봇짐을 풀었다. 먼 길을 걸었지만 세록이는 류청이의 옷고름을 푸는 걸 잊지 않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세록이는 힘이 장사다. 새 보금자리 첫날밤, 류 대감댁 집사였던 세록이는 하늘 같은 주인집 아씨를 품에 안고 밤새 온힘을 쏟아부었고, 청상과부 류청 아씨는 참고 참았던 정염을 질펀하게 불태웠다. 날이 밝자, 집주인 홍 초시가 찾아왔다. “그때 계약금 백냥을 냈으니 잔금이 사백냥 남았지요?” “맞습니다. 여기 사백냥 있습니다.” 홍 초시란 젊은이는 돈을 받지 않고 이상한 제안을 했다. “남한산성 쌓는데 보름만 일하고 오면 잔액을 받지 않겠소.” 세록이의 귀가 솔깃해졌다. 단 보름만 일하고 사백냥이라니! 류청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록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 홍 초시를 따라 세록이가 남한산성으로 갔다. 규모도 엄청났지만 군졸들의 경비도 삼엄했다. 홍 초시가 치부책을 펼친 감독관과 속삭이더니 세록이를 불러 손도장을 찍게 했다.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도 세록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날 밤, 술 냄새를 풍기며 홍 초시가 류청이를 찾아왔다. 류청이가 따졌다. 홍 초시는 비실비실 웃으며 오히려 류청이를 겁탈하려 했다. 은장도를 빼 들어 겁탈은 피했지만 일이 심상치 않게 꼬였음을 느꼈다. 다음날 현청에 가서 따졌더니 세록이의 손도장을 보여줬다. 그날 밤에 또 홍 초시가 찾아왔다. 류청이는 은장도를 빼 들지 않고 웃는 낯으로 대하며 “우리 신랑은 언제쯤 돌아옵니까, 초시어른?” 하고 물었다. 입을 쩝쩝 다시던 홍 초시 왈 “거기서 빠져나올 길은 두가지요. 죽거나 남한산성이 완공되거나.” “언제 완공되나요?” 류청이가 애간장이 타서 묻자 홍 초시는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십년? 이십년?” 이튿날 류청이는 바지로 갈아입고 장옷을 덮어쓴 채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저녁나절 맞은편 산에서 내려다본 남한산성은 연옥도(煉獄道), 그것이었다. 돌을 메고 가다 나자빠지는 사람, 군졸들의 사정없는 몽둥이 찜질. 류청이는 주막집 객방에 누워 또 눈물을 쏟았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온 류청이가 목간을 한 후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자 홍 초시가 찾아왔다. 류청이가 따르는 술잔을 널름널름 받아 마신 홍 초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류청이의 새하얀 종아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좀 편하게 해주세요.” “어떻게?” 류청이가 “이 추운 날씨에 우리 신랑에게 누비옷 한벌 보내드리고∼” 하며 한숨을 토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홍 초시가 앞서고 류청이가 누비옷 보따리를 들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홍 초시는 그날 밤 주막집 객방에서 류청이를 눕혀놓고 요리할 생각에 벌써 하초가 뻐근해졌다. 감독관 포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피골이 상접한 세록이를 데려왔다. 감독관 왈 “한사람이 빠지면 줄줄이 일이 중단되오. 저기 솔숲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동안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일을 하시오.” 얼떨결에 홍 초시가 일터로 끌려가고, 세록이와 류청이는 솔밭으로 들어갔다. * * * * * 밤이 되고 홍 초시가 막사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군졸들의 몽둥이 찜질이 이어졌다. 세록이와 류청이는 손을 잡고 달밤에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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