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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14일 화요일[(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14일 화요일[(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본기도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2ㄱㄴ과 5.6-7ㄱ.7ㄴ-9(◎ 7ㄱ 참조)
◎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아드님이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
○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복음 환호송

1테살 2,13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6(35),10 참조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또는>
요한 10,1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더러운 영을 쫓아내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신호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지만/ 가려 한 날 막아서네./ 난 갈 길이 먼데 새빨간 얼굴로 화를 냈던/ 친구가 생각나네./ 이미 난 발걸음을 떼었지만/ 가려 한 날 재촉하네./ 걷기도 힘든데/ 새파랗게 겁에 질려 도망간/ 친구가 뇌에 맴도네./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동그라미 모두가/ 멈췄다 굴렀다. 말은 잘 들어/ 그건 나도 문제가 아냐/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내가 빠른지도/ 느린지도 모르겠어./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던 노래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신호등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의 흐름이 막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통사고의 위험이 더 커집니다. 이런 신호등도 가끔은 수신호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났을 때는 경찰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대통령이나 외교 사절이 이동할 때도 수신호로 차량을 유도합니다. 수학능력 시험처럼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도, 학생들의 이동 차량을 위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신앙 안에서 신호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빨간불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계명의 파란불은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겁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 이외에도 613개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신호등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과 613개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구속하는 고삐와 같았습니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교회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교회가 보듬어 안을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호등과 수신호는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다만 수신호가 필요한 때가 있기에 수신호를 통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의 수신호입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이 너무 컸습니다. 세상에는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과 새로운 질서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계명과 율법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5년 다해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을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3. 이영근 신부

 

2025년 다해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권위 있는 말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이 ‘첫 번째 행적’으로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과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정보를 드러낼 뿐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라기보다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직접 스스로 명령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이 멈추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13.연중 제1주간 월요일                                                                  히브1,1-6 마르1,14-20

                                                                회개와 추종의 여정

                                                                       “제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나?”

늘 새롭게 물어야 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한결같은 모범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89세 고령의 나이지만 삶은 늘 영원한 청춘의 현역이니 제자직의 롤모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사람들 많이 만나는 분주한 분이지만 피곤한 모습 전혀 없는 늘 미소띤 환대하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전혀 없는 모두가 활짝 공개된 공인의 삶입니다.

한밤중 기상하자마자 인터넷 홈페에지를 통해 확인해 보는 교황님의 날마다 동정입니다. 

 

오늘만 해도 여러 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계속되는 산불로 11명이 사망하고 18만명이 대피한 미국 LA 시민들을 위해

기도를 바쳤고,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여러분의 세례 날짜를 잊지 말라”는 요지의 강론도 했습니다.

시스틴 경당에서 21명 아기들의 세례를 집전하면서, “세례는 최고의 선물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촛불을 밝히라”는 요지의 강론도 했습니다. 

 

또 특기할 사실은 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으로 교황님에게 미국에서 공이 뛰어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도 수여했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평화, 인간의 권리, 가난한 자들을 위하 배려, 환경 지킴이”로서의 기여를 인정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교황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즘 계속 읽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라는 회고록과 “김대중 육성 회고록”입니다.

역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주님의 제자직을 훌륭히 수행해왔던 세계적 정치가입니다.

“애덕의 최고의 형태가 정치다(The highest form of charity is politics)”라는 참으로 멋진 금언을 입증하는

정치가들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고백도 제자직의 수행에 힘을 줍니다.

 

“잠을 떨치고 새벽에 일어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다산>

“첫닭이 울면 정갈하게 씻고 옷을 입는다. 이부자리를 걷고 방과 마루, 뜰에 물을 뿌리고 청소한 다음 자리를 펴놓는다.”<예기>

 

옛 현자들의 진리를 추구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은 오늘의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앞서 세례를 받으신후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과하신후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니

참 멋진 출발입니다.

요한이 잡힌후 곧장 바톤을 텃치한 후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고맙게도 우리 제자들이 추종하는 주님이자 스승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히브리서를 통해 미리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추종하는 주님의 정체가 우리를 용기백배하여 자발적 사랑으로 주님이신 스승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르게 합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참으로 강력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날마다 화두로 삼고 살아가야할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인 오늘 지금 여기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런 긴박하고 절박한 중차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주님은 즉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네 어부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들은 평생 호숫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부로서 한생애를 마쳤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또한 부질없는 “만약?” 이란 질문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하느님의 섭리에 속한 당시 제자들의 삶이자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이를 찾았던 갈망의 사람들인

어부들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이자 스승이신 부르심에 선행하는 진리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는 간절한 갈망이자 열망입니다.

바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야 말로 성소의 원동력입니다.

이런 갈망의 어부들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구원의 출구 주님을 만난 어부들입니다.

마침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무지의 어둠중에 호숫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부로써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전광석화, 주님의 부르심에 ‘무지의 눈’이, ‘갈망의 눈’이 활짝 열린 어부들은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고,

역시 첫눈에 예수님에 반한 어부들은 지체없이 모두를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 나서니

그대로 회개의 표현입니다.

버림, 떠남, 따름으로 표현되는 회개는 한두번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더불어

회개의 여정이자 추종의 여정중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제자들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참으로 연중시기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첫 출발의 시작에 걸맞는 오늘 복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로서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여정,

추종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1/14(화)[(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조재형 신부)

 

2.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요즘 계속 읽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라는 회고록과 “김대중 육성 회고록”입니다.

역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주님의 제자직을 훌륭히 수행해왔던 세계적 정치가입니다.

“애덕의 최고의 형태가 정치다(The highest form of charity is politics)”라는 참으로 멋진 금언을 입증하는

정치가들입니다.(이수철 신부)

 

1/14(화)[(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14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14일(화) 6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