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1월 13일 월요일[(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모든 천사들아, 하느님께 경배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모든 신들이 그분께 경배드리네. ◎
○ 주님,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또는>
요한 10,1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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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주간 월요일
1982년입니다. 어느덧 42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 입구에는 교가를 돌에 새겨놓은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교가의 내용은 비장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세(塵世)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 저의 사제 성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분위기입니다. 5대를 이어오는 천주교 집안이기에 삶의 중심에는 늘 ‘성당’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안 갈 수 있어도, 주일 미사는 빠지면 엄하게 혼났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배워야 했고, 기도문을 다 외워야 했습니다. 부활과 성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성당에서 미사 참례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일학교 친구들입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친구들과 함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본당 출신 3명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의 길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 교가에 나오는 대로 진세를 버리고, 이 몸마저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치지는 않았지만, 큰 과오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하느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가치 있고, 소중하며, 참된 행복을 주는 그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분명 빛이 나는 자리는 아니었고,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2025년의 1월도 많이 지났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 월요일
복음: 마르 1,14-20
우리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선구자 요한이 무대를 잘 꾸며놓고 구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바톤 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 집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4-1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 협조자인 초기 사도단을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전격적이고 뜻밖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잘 배운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열심히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손질하여 내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자신들을 눈여겨보시며, 이윽고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제자들의 성소 출발점을 묵상하니, 어찌 그리 제 성소 여정과 판박이인지 놀랄 지경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하루 온 종일 설계실에 앉아 도면을 바라보고, 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는 갑작스레 제 뒷덜미를 잡고 낚아채셨습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수도 생활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엄청났습니다.
사실 제 학창 시절 내내 생활 기록부에는 늘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임.’ ‘남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니 발표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
어딜 가면 늘 구석 자리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잘 하지 않고,
하루 온 종일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부르시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저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저를 집어 넣으셔서 재창조하시고 당신 말씀의 봉사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히브리서>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각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인데, 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인데,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요한 1,38-39)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이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이는 네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카 11,20 참조).
그래서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놀랍게도 그 어떤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것, 좋지 않는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12.주님 세례 축일 이사42,1-4.6-7 사도10,34-38 루카3,15-16.21-22
세례의 축복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자 연중 제1주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성탄시기의 이벤트 축제도 오늘로써 끝나고 이젠 평범한 연중시기의 시작이요
예수님의 본격적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결과를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시작하라. 모든 시작은 위대하다.”<다산>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결같은 삶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도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세상의 큰 일도 그 시작은 미약하다.”<도덕경>
그러니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어제 2025년 희년을 맞이한 연중 첫 토요일, 교황님은 바오로 6세 홀에서 8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주신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희년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도록 초대한다.”
“희망하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To hope is begin again)”
시작의 위대함을, 늘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는 교황님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미사중 화답송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주님의 세례 축복과 동시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축복도 연상되어 힘이 났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방금 노래한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평화의 복’이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 또한 평화의 복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네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어제도 강조했지만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 바로 지혜입니다. 요한도 예수님도 겸손의 대가입니다.
정말 겸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아니 겸손 자체가 축복이니 겸자무적입니다.
요한이 자기를 아는 겸손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런 요한에게 자신을 낮추어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역시 겸손한 분이십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정도로 유난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처럼 기도에도 늘 초보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언제 어디나 눈들면 하늘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일상에 묻혀 자기를 잃어버리기
십중팔구입니다.
다음 대목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
이제 예사 하늘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하늘길이, 하늘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알면 알수록 모른다는 사실에 저절로 겸손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살아나는 영혼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시들어 죽는 영혼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신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바로 우리의 세례 축일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복된 신원이 세례를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말씀은 그대로 나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보다시피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실현임을 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의무와 책임입니다.
넷째, 사명입니다.
묵묵히 사명을 수행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대로 보고 배워야 할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껴저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예수님의 사명수행을 통해 입증됨을 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주님의 빛’이 되어 예수님의 사명수행에 함께 참여함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이겠습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셨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 예수님이요 이런 주님을 닮아 주님과 함께 이웃을 무지의 질곡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베드로 역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사명 수행에 충실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배우는 가르침이 참 유익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 세례 축일이요 우리 세례 축일이니 초발심의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기도, 신원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고 실천하며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루하루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1/13(월)[(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세례 축일에 배우는 가르침이 참 유익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 세례 축일이요 우리 세례 축일이니 초발심의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기도, 신원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고 실천하며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루하루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13(월)[(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13일차 기도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2025년 1월13일(월) 9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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