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18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 주간)]/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18일 토요일[(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 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입당송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본기도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6(35),10 참조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
<또는>
요한 10,1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로 새로운 힘을 얻고 간절히 바라오니
저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카라바조, '성 마태오를 부르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주간)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도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르 2,13-17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전 인격을 동반한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 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여,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입니까?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르 2,14)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17.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 기념일 

                                                                                                             히브4,1-5.11 마르2,1-12

                                                            믿음의 힘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이다”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엄중하고 엄연한 진리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놀라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축적된 삶이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251년에 태어나 356년까지, 즉105세까지 천수를 누렸던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안토니오의 생애”가 성 안토니오의 삶을 잘 소개합니다.

성인의 생애를 잠시 소개합니다. 

 

‘3세기 중엽, 이집트 중부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안토니오는 부모가 돌아가자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자신과 누이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만큼 남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눕니다.

바로 다음 두 성서 말씀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1)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4)

 

그는 21살에 은둔자가 되어 가난과 겸손, 거룩함과 자기훈련의 모범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유혹을 물리치며 고향 인근에서 살다가 35세 산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성의 폐허로 이동해

무려 20년을 독수자로 살았고, 그동안 6개월마다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자신도 혼자 살면서 필요할 때만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엄격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활기차고 즐거운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그의 쾌활함으로

한눈에 그를 알아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배웠고 성인도 그들에게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60세 때, 종교적 박해 시기에는 순교를 바라며 알렉산드레아에 갔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과도 치열히 싸웠습니다.

이어 끝까지 사막에 은수자로 105세까지 사는 동안 병에 걸린적도 없었고 시력도 좋았으며

치아도 건강했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인 믿음의 대가, 은수자들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삶을 통해서도 하루하루 한결같은 하느님을 찾는 진리추구의 믿음의 삶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무슬림 지도자와의 대화에서, 분열이 아닌 일치의 평화를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종교인들의 믿음의 자세를 환기시켰습니다.

교황님 말씀입니다.

 

“종교들은 평화의 가교들을 찾기 위해 더불어 일해야 한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을 찾는 공부에 항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공부하며 쌓은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지만, 공부해나갔던 자세만큼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다.”<다산>

“군자가 도리에 맞게 학문을 깊이 파고드는 까닭은 스스로 경험해 얻고자 함이다.”

 

살아온 대로 정직하게 새겨지는 삶의 나이테요, 세월의 풍화작용도 견뎌내는  삶에 새겨진

신망애의 나이테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을 찾아 노력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 참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예수님께서도 안식처를 찾듯이 아버지와의 만남이 필요한 새벽마다 외딴곳을 찾아 머물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처에 들어가는데 믿음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이 좋은 동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처임을 믿음의 눈으로 알아봤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주님을 찾으십시오. 

멀리 밖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주님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니 안식처를 찾아 엉뚱한 밖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안식처임은 다음 주님의 초대 말씀이 입증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참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은 중풍병자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눈물겨운 믿음의 노력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어 곧장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육신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느님의 권능이 참된 안식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그대로 발휘되는 틍쾌한 장면입니다.

 혼자서의 치유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입니다.

동료들 믿음 덕분에 치유의 구원을 받은 중풍병자요, 중풍병자와 더불어 동료들도

치유의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좌우간 이분들은 평생 주님의 치유의 구원 체험을 잊지 못했을 것이며,

끊임없이 믿음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죄의 용서로 영혼이 치유되자 저절로 육신의 치유가 뒤따릅니다.

정말 죄의 용서로 영혼치유가, 영혼건강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 장면을 대할 때 마다 생각나는 다음의 미사경문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혼자의 믿음은 약하나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우리 약한 믿음도 더불어 주님의 교회공동체 믿음에 뿌리내릴 때 강한 믿음이 됩니다.

새삼 교회 공동체의 믿음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믿음 좋은 동료들 덕분에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우리 역시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영육의 치유와 구원을 받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1/18(토)[(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주간)], 되새김 구절

 

1.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조재형 신부)

 

2.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참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은 중풍병자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눈물겨운 믿음의 노력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어 곧장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육신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느님의 권능이 참된 안식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그대로 발휘되는 틍쾌한 장면입니다.

 혼자서의 치유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입니다.(이수철 신부)

 

1/18(토)[(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주간)], 18일차 기도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18일(토)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