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19일 수요일[(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의 집 앞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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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지난 설날에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잠시 메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육군 장교로서의 직업군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신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다음 주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성소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성소국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오늘의 묵상 말씀이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습니다. 성소국 홈페이지에 상담 글을 남기면 답변도 주시며 휴가 내어 종종 성소국에 방문하면 차 한 잔 주시면서 상담해 주시던 국장 신부님, 그리고 예비신학교에서도 함께 용기에 불어 넣어 주시던 가브리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주심과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셨던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부제 서품을 받게 되면 성직자가 되는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을 향해 더욱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지금 미국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늘 건강과 기쁨, 은총 가득해지시길 기도드리며 저도 더욱 기쁘게 정진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은 설날이네요!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제가 젊은 군인에게는 ‘마른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방주에 있던 노아는 넓은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물밖에 없는 곳을 한참이나 날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노아는 이제 물이 빠지고 땅이 조금씩 드러난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비둘기는 이제 마른 땅에 머물며 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에게 마른 땅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8,22-26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신앙의 눈>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눈이 감겨 보지 못하는 이뿐만 아니라, 눈이 열려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를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서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며, 불이 주변을 환히 밝혀줌을 보지 못하고서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곧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자신의 어둠에 갇혀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 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져갑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영의 도유’를 통해 치유된 눈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게 하소서. 나아가,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풀 한 포기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베푸신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 행복은 오직 당신을 뵙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8.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6,5-8;7,1-5.10 마르8,14-21
인류의 타락
"하느님의 좌절, 후회와 아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
공부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공부입니다.
둘 같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공부는 나를 깨달아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다산>
날로 새로워지고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깨달아 알아가는
깨달음의 인생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논어의 공자>
논어 맨처음 시작되는 공자의 인생 삼락의 말씀입니다.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삶의 장이 공부의 대상이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학교의
영원한 현역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더구나 오늘 창세기와 마르꼬 복음의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을 대하면 더욱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느낍니다.
주님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좌절, 후회와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건 일부 특수한 사람들이 아닌 인간 대부분의 보편적 현실임을 깨달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흔히 회자되는 “기계는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라는 또,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마디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낙관적 전망을 어렵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저런 물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답은 회개와 깨달음의 선택, 그리고 훈련과 습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서두부터 말씀이 작금의 극심한 분열과 혼란, 부패하고 변질된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아
섬뜻한 느낌도 됩니다.
흡사 온몸에 퍼져가는 암세포같은 세상 악의 현실을 보면 더욱 이런 느낌이요, 날로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중병을 앓고 있는 공동의 집인 하나뿐인 지구를 보면 과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단숨에 읽히는, 공감이 가는 제1독서 창세기 말씀 전반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보시고,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 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섭게 마음에 와닿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지 않습니까?
여전히 반복되는 악의 현실에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둘 수 있는가 묻게 됩니다.
위 내용만 보면 성악설이 맞고, 앞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성선설이 맞고
또 둘 다 해당되는 역설적 인간 존재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절로 고백하는 엊그제 인용했던 ‘산앞에 서면’ 이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는 세상 피조물들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앞서
노아에게 하달되는 명령이요, 노아는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신 그대로 다 합니다.
우리 인간의 롤모델로, 하느님의 희망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노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의롭고 흠없는 노아처럼
한 번 살아보라는 주님의 원의를 감지합니다.
노아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그대로 히브리어 직역인 영어-“He walked with God”- 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발로 걸을 때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길벗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제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에 대해 탄식하며 좌절감을 표현했던 주님은
오늘 제자들의 눈먼 현실에 그대로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얼마전 있었던 빵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정말 대책없는 무지에 눈먼 제자들이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치 제가 받는 질책처럼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새삼 우리 인생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깨달아 나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순수해지고 자유로워져,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져 참나가 되어가는 “회개와 깨달음이 여정”임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2/19(수)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조재형 신부)
2.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노아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라는, 그대로 히브리어 직역인 영어-“He walked with God”- 가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발로 걸을 때 늘 ‘영원한 동반자’이자 길벗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얼마전 있었던 빵의 기적을 까맣게 잊고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정말 대책없는 무지에 눈먼 제자들이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이수철 신부)
2/19(수)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
- 2025년 2월19일(수) 5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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