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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2일 주일[(녹) 연중 제8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2일 주일[(녹) 연중 제8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8주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지는 말씀은 지혜의 샘이며 삶의 규범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알아들을 귀를 열어 주시어, 교만으로 형제들을 그릇되게 판단하지 않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시편 18(17),19-20
주님은 내 버팀목 되어 주셨네.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에, 넓은 들로 이끄시어 나를 구하셨네.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시고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27,4-7
4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5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6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7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2(91),2-3.13-14.15-16(◎ 2ㄱ 참조)
◎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
○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
○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54-58
형제 여러분,
54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필리 2,15.16 참조
◎ 알렐루야.
○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 알렐루야.

복음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9-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돌보시어,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티를 돌아보는 겸손과 용기를 가진 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군사적 긴장 속에 있는 저희 민족을 굽어보시어, 남북이 군사력이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써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3.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새로운 환경에서 관계 맺음과 배움을 시작하는 이들을 보살펴 주시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기쁜 나날을 보내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모든 이가 절제와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며 다가오는 사순 시기를 슬기롭게 준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을 마련해 주시고
이 예물을 저희 정성으로 받아 주시니
자비를 베푸시어
이 제사를 저희 공로로 여기시고
더 많은 상급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3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3(12),6 참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
<또는>
마태 28,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 모두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 선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합시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8주일

 

1977년이면 48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난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난 사람은 권력을 얻을 수 있고, 난 사람은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문화와 문명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맞습니다. 난 여러분이 공부를 통해서 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된 사람은 나는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4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선생님의 말씀은 제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합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옳고 합당한 말 같지만, 듣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판단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네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일이 있겠니라고 판단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피부색, 외모, 직업 등 외적인 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비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냈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죄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도 내려오고, 나도 내려오게 해 주시오라고 비난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는 왜 늘 그 모양이냐!’라고 말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세 번째는 강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재능과 능력을 보지 않고 의대나 법대를 강요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네 번째는 당연시입니다. 한 신자가 교회에서 오랜 기간 봉사를 해왔지만, 몸이 힘들어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신부님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교우는 상처받습니다. 친구가 힘든 일을 겪고 속상해서 이야기하는데 때,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왜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상처받습니다.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어서 위로받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 친구가 이렇게 말하면 곧 헤어질 수 있습니다. "네가 나 좋아하면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8주일다해

복음루카 6,39-45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젊은 수도자들의 수련장 역할을 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련장은 수도회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 수도자들의 전반적인 양성을 책임져야 하니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수련장은 이태리어로 Maestro, 영어로는 Master, 그러니 말마디 그대로 스승이요,

바꿔 말하면 수도자들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주로 주어지는 일은 미우나 고우나 늘 수련자들 곁에 붙어있으면서 제발 인간 되라고 잔소리하는 일입니다.

목표치를 설정해주고 밀어붙이면서 자극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마냥 그래서는 어린 수사님들이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때로 상담가가 되어 위로도 해줘야 하고, 격려도 해줘야 하고 박수도 쳐 줘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을 바꿔가며 사용하면서 수도자로서의 틀을 만들어주는 3D 업종 종사자가 수련장입니다.

 

정기적으로 수련자들을 집합시켜놓고 불러 모아놓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수도자 될 사람이 이래도 되냐? 저래도 되냐?

기도시간 적어도 10분 전에는 딱 나타나 있어야 된다.

묵상 시간에 졸면 어떡하냐?

나중에 사목자요 공인이 될 사람이 밥 먹을 때 그렇게 소리를 내냐?”

 

그래놓고 나중에는 제가 자충수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떤 때 수련자들은 다들 기도시간에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제가 제일 늦기도 했습니다.

다들 진지하게 묵상에 전념하고 있는데, 저만 묵상 시간에 쿨쿨 잘 때도 많았습니다.

 

예리한 수련자들은 그런 순간을 또 놓치지 않습니다.

딱 기억해놓았다가 자기들끼리 두고두고 수군거립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제일 미안했던 부분입니다.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형제들에게 강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들의 작은 흠결에 연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름 스승이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가 봅니다.

특별히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잔뜩 폼만 있는 대로 잡고 다니던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스승들을 향해 날리는 예수님의 직격탄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들보라는 표현을 통해 꽤 센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이겠지요.

아무리 우리 눈이 왕방울만큼 크다 하여도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들보가 우리 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기에 앞서 내 발밑을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나란 모순덩어리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상대방 입장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이웃들의 의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참 인간이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8주일

 

<우리의 말과 판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의 ‘혀’와 ‘눈’을 통해서 ‘마음’을 보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혀)에서 드러나고”(집회 27,4), “사람의 말(혀)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27,6)고 말하며,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라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은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도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옴을 말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루카 6,45)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찬미하오며, 우리의 ‘혀’가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 92,3) 하고 화답송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음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품으신 아버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1코린 15,57)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2,14-15)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1코린 15,58)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 13,6) 하고 영성체송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눈먼 스승의 비유', 곧 제 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위선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 장면과 연결해 볼 때, 결국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판단보다 앞서, 하느님의 '선의(호의, 자애)의 마음'(헤세드)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 예레 17,10;21,14; 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매’는 ‘혀와 눈’, 곧 ‘말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는 행실로, ‘나무’는 ‘마음의 곳간’으로 표현됩니다.

곧 ‘열매’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과 눈으로 하는 ‘판단’으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선한 것이 담겨 있는지 악한 것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말과 판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과 판단의 곳간이요, ‘말과 판단’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과 판단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호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과 판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하면서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고, 오늘 복음의 뒷절에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라고 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1.연중 제7주간 토요일                                                                  집회17,1-15 마르10,13-16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성사”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리라.”(시편103,17ㄱㄴ)

 

오늘은 3월 성요셉성월의 첫날 3월1일이자 삼일절입니다.

올해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 1919.3.1.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났으니 삼일절 10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보며 조용히 불러보는 삼일절 노래입니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민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4대 국경일 노래를 작사한 분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위당 정인보 선생입니다.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이런 삼일절 역사를 지닌 구체적 대한민국 사람인 우리들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아주 예전 어느 수녀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참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세상입니다.

극단적 이념에 경도된 광기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밤중 도착한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글입니다.

 

“연기처럼 사라질 인생이다.

 집착하지 마라.

 바람처럼 날아갈 인생이다.

 욕심부리지 마라.

 한줌의 흙이될 인생이다.

 가볍게 살아라.”

 

허무하고 덧없는 무의미한 인생, 공감이 가지만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얼마전 ‘2024.12.20. 밤7:42분 붓을 들어 2025.1.11.무려 3주만에 탈고했다’는

도올의 ‘상식’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상식이 실종된 시대 상식을 일깨우기 위한 심정에 쓴책입니다.

후반부 내용중 공자와의 주고받은 문답입니다.

 

“인(仁)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선생님,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는 것이다.”

“늙은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젊은이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공자야 말로 우리 예수님과 더불어 참사람의 원형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은 황금률을 실천함이 바로 참사람임을 깨닫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되는 진리는 황금률이다.

‘나 자신을 대하는 것같이 항상 타인을 헤아리라.”<다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논어>

 

제 책상위에 말씀집 3월 주제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입니다.

복음선포에 앞서 복음이 되라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이자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의 신비를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대한 해명입니다.

아쉽게도 전문이 아닌 일부만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시고,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총 선물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평생 과제입니다.

그분앞에 드러나는 모두의 참사람이 되는 공통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어린이처럼’이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남녀노소 상관없이 열려있고 유연하고 신축적이며,

편견이 없는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 가난하고 깨끗한 이들입니다.

 

십자가 길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충실할수록 이런 천진무구의 어린이처럼 됩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접근에 완고한 마음으로 차단하는 제자들에게 몹시 불쾌해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물론 하느님의 모상이자 성사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낍니다.

사실 나이에 관계없이 내면의 인간원형은 순수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님 안에 머물수록,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장 성숙하는 각자 내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의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따뜻한 스킨십의 달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안으시고 축복해 주시니 우리의 내면은 치유되어

어린이처럼 날로 개방적이고 순수해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와 치유가 되는, 내면의 야수를 길들이는 주님 사랑의 따뜻한 스킨쉽을

닮도록 합시다.

이런 사랑의 스킨십의 결핍으로 날로 어두워지고 굳어지며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11.29). 아멘.


3/2(일) [(녹) 연중 제8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님 안에 머물수록,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장 성숙하는 각자 내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의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따뜻한 스킨십의 달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안으시고 축복해 주시니 우리의 내면은 치유되어

어린이처럼 날로 개방적이고 순수해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와 치유가 되는, 내면의 야수를 길들이는 주님 사랑의 따뜻한 스킨쉽을

닮도록 합시다.

이런 사랑의 스킨십의 결핍으로 날로 어두워지고 굳어지며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11.29). 아멘.(이수철 신부)

 

3/2(일) [(녹) 연중 제8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일(일) 4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