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10일 월요일[(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천상의 가르침으로 저희를 회개시키시어
사순 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은혜로 저희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몸과 마음에 힘을 얻고 비오니
저희가 천상 영약을 충만히 받아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이 백성의 마음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어
해야 할 것을 깨닫고
올바른 일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저는 아침에 달걀, 우유, 떡, 야채를 먹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몸이 활기차고 힘이 납니다. 오트밀, 그리스식 요구르트, 달걀, 통곡물로 만든 빵과 같은 음식들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도와줍니다. 반면, 도넛이나 설탕이 많은 시리얼,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들은 순간적으로는 달고 맛있지만, 금방 피곤해지고 건강을 해칩니다.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가난한 이에게 먹을 걸 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볼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약해지고 병들어갑니다. 마치 아침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건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양과 염소로 나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를 입힌 이들입니다. 반면, 염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아침에 꼭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말씀, 용서입니다. 먼저, 기도는 우리를 하루의 시작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몸이 힘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영혼도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입는 갑옷과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에 임하는 신앙인에게 무기와 같습니다. 기도는 먼 길 떠나는 자동차에 필요한 기름과 같습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마음을 다스려 줍니다. 하루를 말씀과 함께 시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작은 구절이라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영혼이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말씀은 신호등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미움과 분노를 품으면 그날 하루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하루가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선행 하나하나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마치 매일 아침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몸을 위해 건강한 아침을 챙겨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25,31-46
웃픈 현실 앞에서...
사순시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난 시절 지은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가슴도 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을 치는 행위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도 회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측면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표현 안에는 ‘안다’ ‘인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삶에 여유가 없어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미처 몰랐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역시 회개입니다.
칼라너 신부님의 표현에 따르면 회개란 우리가 지니고있는 지극히 협소한 인식 지평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노력이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소리 조차 귀기울이시는 주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 다음 작업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나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흙이요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죄와 한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왜? 우리 각자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을 잘 알게 되면,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란 존재는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회개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의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좋은 마음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신 사람들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우리는 습관처런 병자 방문을 가고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또 다른 예수님이시랍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그런 죄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최악의 생활고와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참담한 사태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가슴을 찢고 있는데, 무슨 세계 챔피언 먹은 것도 아닌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이지 참담하고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 가족, 주변에 죽치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의 회개와 새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슬픈 저녁 시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오 25,31-46
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히브 10,26-27)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10.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19,1-2.11-18 마태25,31-46
최후 심판의 잣대
“사랑”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참 오랜만에 사순 제1주일 미사중 영성체후 기도후 잠시 공지사항에 준하는 말씀 전한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미사에 참석했던 신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각인됐을 것입니다.
미사강론후에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강론중 빠진 것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미사전례입니다.”
사랑의 성체성사요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성체성사입니다.
바로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에 나오는 옛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시편을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든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그 진리를 체험하기까지는 낯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느님만이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그 기도소리를 듣는다!
네가 비록 시편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악마는 의식한다. 그들은 듣고 떤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 떠는 것이 사랑의 찬미인 시편성무일도 노래랍니다.
“악마여, 주님을 찬미하라!”하면 악마는 질색하여 달아난다 합니다.
사랑의 선택-훈련-습관을 위해 평생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영성훈련보다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만세칠창후 바치는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 ‘사랑의 전사’이다.”
교황님의 정치에 대한 견해에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정치는 삶이요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는 ‘애덕의 최고의 형태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가톨릭신자는 자신의 최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20년 이상 알고 지내는 모녀분이 오랜만에 함께 피정을 왔고, 그 어머니가 율리안나 딸에 대한 칭찬이 좋아
격려하고 싶어 율리안나를 불러 그대로 전했습니다.
“우리 율리안나는 크게 성숙했고 도량도 크게 넓어졌습니다. 저는 율리안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랑의 성숙이요 사랑의 도량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랑하라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입니다.
저역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매일강론입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이자 의무요, 임종시에도 남는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현대판 악령들린 사람들처럼 증오, 혐오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억울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인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이요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평화학’, ‘화해학’이란 학문도 있다는 데 ‘사랑학’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학 박사되기가 소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최후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과 남녀 차별없이 온인류에 적용되는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일반적 종교수행이나 관례나 관습이 아닌 실제적 사랑입니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몸의 현실에 직결된 구체적 실제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이 곤궁중에 있었을 때, 즉
“1.굶주렸을 때,
2.목말랐을 때,
3.나그네였을 때,
4.헐벗을 때,
5.병들었을 때,
6.감옥에 있었을 때,”
도왔는가 묻습니다.
즉 6개의 구체적 항목이 열거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양들과 버림받은 염소들로 분리하면서 곤궁중에 있던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는 누구나 예외없이 또 하나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며 곤중에 있는 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해서 비로서 사람이요 사랑이 최후심판의 잣대이자 구원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고,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하듯 디테일에 강한 사랑임을
오늘 레위기에서 배웁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 맨처음에 나오고 구체적 부정적 ‘안된다’라는 이웃 사랑이 나열될 때 마다 후렴처럼
“나는 주님이다.”란 말마디가 못박듯이 나옵니다.
중간쯤에는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가 나오고
끝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결론처럼 나옵니다.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거룩함이요 경외함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된 구체적 이웃사랑의 항목을 나열해 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히 준수해야할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속여서는 안된다.
3.사기해서는 안된다.
4.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5.이웃의 것을 빼앗서는 안된다.
6.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7.귀먹은 이들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8.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9.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0.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는 안된다.
11.세력있는 자라고 우대해서는 안된다.
12.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는 안된다.
14.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앙갚음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긍정적인 사랑의 의무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3.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4.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5.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정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요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인지 또 사랑이 모두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임을,
‘사랑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평생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요 저절로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겸허한 자각이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실천에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3/10(월)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몸을 위해 건강한 아침을 챙겨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전삼용 신부)
4.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거룩함이요 경외함입니다.(이수철 신부)
3/10(월)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작은 실천이 모여 나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10일(월) 8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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