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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5월 17일 토요일[(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5월 17일 토요일[(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1베드 2,9 참조
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8,31-3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2 <그리스도의 새 생명>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믿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렸나이다.
주님의 죽음으로써 저희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주님의 부활로써 모든 이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7,24 참조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하시어,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4주간 토요일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렸다는 분도 있고, 감기를 달고 산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저는 1년에 한 번 정도 목 감기가 오는 편입니다. 저도 알고, 감기도 알기에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소금물로 입을 헹구거나, 프로폴리스를 뿌려주면 며칠 있다가 감기는 떠나곤 했습니다. 이번 부활에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잔기침, 가래, 미열, 근육통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성주간을 지내면서 조금 무리했던 것도 원인이 있고, 시간 조절을 잘 못해서 너무 무리하게 생활했던 것도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차를 마시고, 약을 먹었더니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하나둘 떠나갔습니다. 이번 감기를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이 집을 잘 만들었어도, 그것을 잘 지키지 않으면 더 센 사람이 와서 차지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외적인 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영혼을 뜻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기도의 집을 잘 지어놔도, 그 안을 지키지 않으면 어느새 악의 세력이 들어와 차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병에 걸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외부 바이러스가 강해서, 둘째는 내 면역력이 약해서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유혹, 악의 세력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내 영혼의 면역력, 곧 기도와 말씀, 희생과 사랑의 내공이 단단하면 그 어떤 유혹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면 평화와 기쁨이 찾아오지만, 세상의 욕망으로 채우면 오히려 불안과 혼란이 깊어집니다. 하느님 없는 영혼은 빈집과 같습니다. 빈집은 언제든지 도둑이 들어올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율법과 계명의 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복음의 기쁨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만 복음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입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없는 집입니다. 그 빈자리는 언젠가 다른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성공, 권력, 명예를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도 생각해 봅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믿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매일 기도로 대화하고, 말씀으로 호흡하고, 이웃과 나누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몸에 감기가 찾아오는 것처럼, 마음에도 감기 같은 것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작은 불평, 원망, 질투, 무관심. 욕심, 시기, 질투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우리는 내 안에 하느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마음을 매일 환기해야 합니다. 기도로 창문을 열고, 말씀으로 숨을 쉬고, 희생과 나눔으로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면역력이 자라고, 믿음의 집이 튼튼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믿는 사람의 삶은 기적이 됩니다. 사랑이 되고, 용서가 되고, 치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요한 14,7-14

 

우리 신앙 여정은 부단한 깨달음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직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필립보 사도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꽤 긴 시간 그분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필립보 사도는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부단한 자기 수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 여정은 부단한 깨달음의 길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그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가운데 계신다는 깨달음.

그분은 고통받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 살아 숨 쉬고 계신다는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도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는 이 하루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이며 축복이라는 깨달음...

 

2025년 정기 희년을 맞아 본당이나 단체에서 강의 초대가 오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라는 주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강의 마무리에 저는 빼놓지 않고 희망의 성자이신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신앙을 소개해드립니다.

 

이분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마자, 즉시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됩니다.

삼촌이 남쪽 베트남 정부의 고위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절차도 재판도 없이 즉시 체포·구금되었고, 억울하게 13년간 억울하게 감금 생활을 하셨고,

그중에 9년간 독방생활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투옥 초기에는 연말이면 풀려나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습니다. 1년, 2년, 3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수감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사이공 대교구 부주교로서 활기차고 보람된 사목활동을 전개해나가던 주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독방 신세가 되었으니, 그 답답함과 참담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깊은 기도 중에 주교님은 한 깨달음에 도달하고, 그 결과물로 이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리라! 그 대신 매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리라!”

그 숭고한 깨달음 이후, 주교님은 놀랍게도 독방을 평화로움과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또 다른 성전이자

주교관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독방생활의 스케줄을 짰습니다.

매일 새벽, 한 조각의 빵과 세 방울의 포도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거룩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기억나는 성경 구절을 독방 바닥에 써놓고,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렉시오디비나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행하신 렉시오 디비나의 결실은 작은 담배갑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으셨는데, 퇴근하는 간수에게 전해졌고,

매일의 묵상 나눔은 베트남 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주교님의 렉시오 디비나의 결실들은 후에 ‘희망의 길’ ‘희망의 기도’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등등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상태에서도 주교님은 희망하고 또 희망했습니다.

창문도 없는 어두컴컴한 독방, 딱딱한 밀집 매트, 지독한 습기로 인해 바닥은 이끼로 덮혀 있었고

매트와 마루 위에는 버섯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열악한 상황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혹독한 심문과 협박, 그리고 짙은 고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 이후 주교님은 더 이상 주변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유로워지셨습니다.

엄청 답답하셨을 텐데, 독방 생활이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제가 갇혀 있는 감옥 근처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끔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는 또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주교님께서 독방에서 쓰신 감사 노트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나에게는 거저 받은 선물이 많습니다.

반짝이는 아침 이슬, 햇빛, 한낮의 열기, 맑은 샘물, 시원한 바람, 새들의 지저귐, 따뜻한 우정의 손길,

친근한 교회 종소리.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가득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일 원 한 푼 내지 않고 누리고 있습니다.

눈을 바로 뜨고 정신을 차리면 끊임없이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은총의 기억이 나를 뒤덮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고 깨닫고, 그래서 우리의 겨자씨만큼 미미한 신앙이

조금 더 성장하는 하루가 되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요한 14,7-14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다음, 제자들이 보인 세 번째 반응입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한 14,9-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엄쳐 다닐 수 있는 것이 물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4항).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5.16.부활 제4주간 금요일                                                                  
사도13,26-33 요한14,1-6


귀가(歸家)의 여정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경각심을 줍니다.
“어떤 사람에게 내일은 젊음이자 기대이지만, 누군가에게 내일은 늙음이자 두려움이다.”<다산>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자에게 내일은 젊음이자 마음 설레는 기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마음 설레는 젊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를 소원합니다.


“뒤에 태어난 이들을 존중하라(후생가외;後生可畏). 어찌 그들이 지금 우리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젊음이에 대한 존중 또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에게 선사되는 겸손과 온유의 선물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 마음에 담고 삼아야 할 말마디들입니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시 <속보>에 떴던 반갑고 고맙던 말마디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속보, 교황청 국무처장인 케빈 페렐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아침 7시35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발표하였다.’


짧은 언급이지만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 라는 말마디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믿는 이들의 경우는 죽었을 때 분명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에나 신문 부고란을 유심히 봅니다.
거의 대부분 예외없이 90전후에 돌아가십니다.
새삼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10-15년쯤 남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귀가의 여정,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할 날도 가까워진다는 생각과 더불어 베네딕도 성인의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귀가의 여정’중, 여러분은 과연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는지요?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내 인생 압축해봤을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일년사계(一年四季),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해 봤을 때 과연 내 인생은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요?
자주 묵상하는, 피정자들과 나누는 주제입니다. 


이런 묵상이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 꽃자리에서 환상이나 허영, 거품이나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진실하고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으며 이래야 남은 인생 휴가를, 아버지의 집에로의 귀가 여정을
보람있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인생휴가, 인생소풍 끝내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날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하겠는지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주 오래전 푸른하늘 두둥실 떠다니는 흰구름을 보며 쓴 '흰구름'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하늘 본향 아버지의 집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 영혼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된다”<2008.5. >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이 이런 묵상이 옳았음을 밝혀 줍니다.
우리 마음에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주는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입니다.
귀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언제 예수님이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분명합니다.
탈선하거나 미아가 되어 방황없이 아버지의 집에 가는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이자 진리이신 아버지께 이르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이라는 길뿐입니다.
생명과 빛이신 예수님 길을 벗어날 때 아까운 인생 탕진하면서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미아가 되어 살 수 있고, 생명이 아닌 죽음의 세상을, 진리가 아닌 거짓의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같은 이 세상에서 탐욕에 눈멀어 연옥이나 지옥같은 삶을 사는 어리석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귀가의 여정은 아버지의 집에 가는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니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복음선포의 삶이 일상화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시편 제2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낳았노라.’”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며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너는 내 아들(딸), 내가 오늘 낳았노라.”(시편2,7ㄷ)는 말씀대로,
날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태어나 부활의 삶을, 영원한 청춘의 삶을,
기쁨과 감사중에 귀가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돌려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5/17(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믿는 사람의 삶은 기적이 됩니다. 사랑이 되고, 용서가 되고, 치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그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가운데 계신다는 깨달음.

그분은 고통받는 우리 인간들 사이에 살아 숨 쉬고 계신다는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도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는 이 하루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이며 축복이라는 깨달음...

(양승국 신부)

 

3.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며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너는 내 아들(딸), 내가 오늘 낳았노라.”(시편2,7ㄷ)는 말씀대로,
날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태어나 부활의 삶을, 영원한 청춘의 삶을,
기쁨과 감사중에 귀가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돌려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멘.(이수철 신부)

 

5/17(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5월17일(토) 6시40분 -